Home Main Image

PC에 최적화 되어있는 사이트입니다. 모바일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개인용 번역 블로그

18TRIP 위주 여러가지 번역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오역, 의역 문의 받지 않습니다


캡처 및 2차공유 자유 (알잘딱합시다)

개인 컨택 @dearDIEIN


왼쪽 플레이어에는 가볍게 듣기 좋은 곡들이 있습니다.

Arcaea 메인스토리 2장 백업

개인용 백업 
보기 편한 순서대로 정리함
 
마야 > 혜안 / 사야 스토리로 돌아와서 비타 > 사야 > 레테 > 레테 2장 > 사야 2장 / 마야2장 / 연민
 
 


 

그녀는 별빛 아래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자.

한때 새하얗던 아르케아의 세계엔 끝없는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어졌다.

그리고 밤의 하늘에서 두 새로운 영혼이 유성처럼 땅으로 내려앉았다. 첫 번째를 닮은 그 소녀는, 두 번째였다.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달이 뜨지 않는 밤…

마야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이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두 눈. 의식과 감각이 돌아온 순간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리의 세계로 오는 모든 이들은 무지의 축복 아래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이후 발견된 이 장소는 어딘가 망가져있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근본부터 망가져버린 장소…

이곳에서 소녀는 모든 것을 안은 채 깨어났다.

 
 
 
 

소녀는 어둠이 좋았다. 고요함이 좋았다.

유리 조각에 반사된 빛을 볼 때마다, 끔찍한 색채로 일렁이는 섬광이 그녀의 눈을 침범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지면 저 아래에서 올라온 그르렁대는 고동이 칼바람처럼 그녀의 귀를 쏘아붙였다.

고요한 밤의 침묵이 깨질 때마다, 마음의 심연 속에서 기어 올라온 기억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는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그녀를 동정했다.
두 색채를 품은 머리칼과 눈. 마야는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다.

아르케아는 그런 마야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 조각이 두려웠다.

소녀는 끝나지 않는 밤에 흐르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유리 조각과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에, 숨을 곳을 찾기로 하였다.

마야는 무너져 내린 건물과 어두운 동굴을 전전하며 그 몸을 뉘었다.

어딜 가나 유리 조각은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빛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끔찍한 광채를 발하지 않았으며, 어차피 소녀는 도저히 유리 조각을 직시할 수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고요함만을 찾아 산과 들을 넘고 잊힌 도로와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가로질렀다.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걸어 빠져나온 어느 날, 그녀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그어진 낮과 밤의 경계를 보았다.
 
 
그녀의 귀를 찢어발기던 그 소음은 사람의 비명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던 광경이 비명의 원인이었다.

눈 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갈랐다. 수 초 안에 끝나기를 기도했던 악몽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며 소녀의 고향을 불태웠다.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친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울리던 상관의 명령조차 이윽고 침묵했다. 몇 시간에 걸쳐 느리고 무자비하게 그녀와 세계를 잇던 끈이 하나둘씩 끊어져 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이곳, 아르케아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저 경계선은 마치 일몰, 아니, 화염에 휩싸인 세계와 같았다.

 

마야는 주저앉았다. 환각과 환청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말뚝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격통.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쥐어틀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공포,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각이 특히나 무겁게 마야를 짓눌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는 단 하나의 진실.

‘나만 남아버렸어.’

소녀의 고통이, 부서진 마음이, 울음에 담겨 울려 퍼졌다. 아르케아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주저앉은 소녀는 귓속에 울려 퍼지는 소음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할 수 있다면 생각조차 그만두고 싶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미 저지른 실수. 이미 행해진 파괴행위… 모두, 이미 일어나버린 일.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마음은 아직 고칠 수 있는 걸까? 울고 있는 이 소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유리 조각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시 또 하나. 천천히 내려오는 유리 조각의 비가 모이자, 소녀의 주변을 둘러싸는 벽이 되어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을 가렸다.

 

마음을 빼앗을까? 아니, 불가능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까? 이미 자기 내면에 과하게 몰입한 상태라 불가능해. 어떡할까?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하면…

유리 조각이 발하던 빛이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소녀를 둘러싼 유리 벽이 마치 천처럼 접혀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유리 조각은 바보같이, 자기가 비단처럼 부드럽다고 믿는 모양이다. 마야는 한 번 몸을 움찔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유리 조각에 비추는 기억들이 보였다.

 

다른 이들의 기억. 슬픔과 고통과 실수의 기억. 아르케아가 지금 소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잠자코 그 기억을 바라보았다.

…유혈사태, 싸움, 전쟁이 아닌 또 다른 기억.

…그럼에도 고통받고, 그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곁에 없는 사람들의 기억. 완전히 홀로 남은 이들의 슬픈 기억…

 

울부짖는 남자와 여자, 소녀와 소년. 삶의 끝에 다다라 빛바랜 사진을 손에 쥐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

소녀는 생각했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전하고 싶은 바는 그런 것이다.

다시는 웃지 못할지도 몰라.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는 어떤 의미가 있지?

과거는 과거지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지울 수 없어. 그중 일부는… 어쩌면, 대부분은 네가 스스로 새긴 흉터겠지.

하지만 넌 아직 남아있어. 너의 세계는 사라져 버렸지만, 넌 아직 여기 남아있어.

 



부탁이야.

떠나지 말아줘.
 
 
 
 
 
“‘떠나지 말라고’...?”

들려오는 속삭임에 대답하는 소녀의 속삭임. 소녀가 아르케아에서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를 실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건조하고 따가운 목으로, 소녀는 들려왔던 속삭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눈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이를 갈았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보여준 연민에 대한 그녀의 답은…

…분노였다.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의 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일렁이며 비추는 풍경을 바꿨다. 고요하고 잔잔한 슬픔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기억이 채웠다.

유리벽의 한 면이 물결쳤다. 마야는 그곳에 비추는 기억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짙게 어둠이 드리운 남자의 기억. 밤바다에 발을 담근 여자의 기억. 그녀는 잠시 손에 쥔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냈다.

검은 정복을 입은 아이의 기억. 아이의 언니가 손을 잡아주려는 듯 뻗은 팔을 아이는 말없이 뿌리쳤다.

마야는 미소 지었다.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만약 이 기억들에 자신의 마음이 동하고 있는 거라면 어찌나 끔찍하고, 어찌나 웃기는 일일까.

 

실제로, 소녀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하려 내미는 손 따위에는…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마음이 더더욱 뒤틀리고 망가지자, 그녀의 비애가 유리 조각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가는 듯했다.

조각들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엉겨 붙더니, 하나둘씩 뒷면으로 뒤집어져, 반대면과는 다른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망가진 삶을 살았던 이들의 또 다른 기억.

유리 조각들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의 삶이 망가지게 된 순간의 기억들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야는 그들이 겪은 재난과, 실패와, 실수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세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유리 조각에게 사로잡혔다.

조각들은 소녀의 몸을 기어올라가 구속하듯 감싸고 조이며, 반짝이는 사슬처럼 서로를 잇더니 그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목을 짓눌렀다.

마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약하게, 심장이 고동쳤다… …하지만 그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 조각이 부들거리더니, 이윽고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 순식간에 유리 조각이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사슬이 소녀의 몸을 더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검은빛 가루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더니, 그녀를 조이던 유리 조각의 사슬이 서서히 바스러졌다.

소녀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일몰의 빛이 또다시 저 멀리에서 그녀를 비추었다.

 

마야는 밤의 하늘을 올려다본 뒤, 빛나는 경계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혼란. 분노. 실망.

그런 감정들이 소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이 여전히 그녀를 비추었다.

하지만, 곧 그 빛의 따뜻함은 사라졌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앞에 보인 것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벽이 소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자와 유리로 이루어진 터널이…

머나먼 일광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힘겹게 땅에서 일어서 터널 끝에 보이는 한 점의 빛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빛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분 전에 그녀가 지나왔던 복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유리 조각이 발하는 빛일 것이다.

소녀는 그 두 길 사이에 서서 생각했다.
선택이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편안한 어둠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두려운 빛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야는 무릎을 끌어안고 생각했다.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공포를 마주하라는 거야? 아니면… 포기하라는 거야?”

소녀가 화를 머금고 속삭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귓속에 울려 퍼지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기억을 그만두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고통받고 싶어.
상처받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사실, 소녀는 여전히 이 답들 중 하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소녀의 기억은 종말의 순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서 겪은 모든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행복한 순간은 수없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하나가, 종말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그 죄책감이 영원히 그녀를 물들였다.

“...”

소녀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행복해질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을 때.

심판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그런 딜레마 속에서 자신에겐 선택할 권리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갈래 길일 때에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우둔의 시대는 지났다. 백치가 불러온 모호함과 동정심의 시대는 끝났다.

소녀들의 눈은 뜨였고, 반쪽 하늘에 드리우던 구름은 사라졌다.

별들도 빛을 발하고,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도 수그러들었다.

마야가 유리 조각의 사슬에 묶여있을 때 바라던 것, 절망의 끝자락에서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래를, 세계는 거부했다.

그 대신 세계는 소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아르케아가 이를 원했기에.

 

소녀는 다시 일어서 벽을 마주했다. 유리 조각들이 또다시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그 어떤 기억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께에 달린 붉은색 테두리의 꽃잎 장식을 바라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나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에 손을 얹고 지켜봐 주는 듯한 감각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며, 슬픔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결정하라.

 

마야는, 걸어나갔다.
 
 

 
 
 
임종의 때는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야. 그런데,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봤어?

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의 경계를 건너 영원히 저승을 맴도는...

그런 기분이 드는 세계가 있거든.

「얼마나 좋을까?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 세계가, 너를 부르고 있어.

 

빛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너. 마치 눈물처럼 누군가의 영혼에서 흘러나와 아름답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은 마치 반짝이는 수정과 같았어.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이 기억의 세계에 찾아온 그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지.

두 빛깔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거야.

너랑 비슷하게 두 색을 지닌 애가 있긴 해. 하지만 그 애의 색채는 가짜야.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너는 “진짜”야.

잊히고 버려진 삶이 흘린 마지막 눈물처럼, 너는 높은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떨어져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 사이에 안착했어, 그날의 하늘은 아주 어두웠지.

그 세계의 절반은 영원한 밤이 뒤덮고 있거든. 너는 별빛을 받으며 눈을 떴어.

 

“아르케아”의 별은 자주색이야. 네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연보랏빛 하늘과, 그 밑으로 춤추듯 떠다니며 반짝이는 기묘한 물체들이었지.

하늘을 부유하는 유리 조각... 그 동화와 같은 물체들의 이름 또한 “아르케아”였어. 유리 조각 안에는 기억이 담긴 것처럼 보였지.

너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아르케아”라는 이름까지도.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지. 아무것도 말이야…

너는 오로지 “너 자신”의 기억만 지니고 있었으니까.

네 가슴을 가득 메우는 그 고통과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저질러버린 끔찍한 행위의 기억...

너는 그 세계를 떠나왔어.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죄악의 사슬이 온몸을 조이며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해. 네가 세계에 새긴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이 네게 스며들어.

너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지. 아아, 달콤한 비애여...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너조차 잊은 게 있었지.
자신의 이름. 넌 자신이 누구인지 완벽하게는 알지 못했어.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너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어.

사실, 너는 네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느끼는 그 감정들은 모두 진실이었어. 그 기억 또한 진실이었고. 그것만은 틀림없지.

그리고 새로운 이름... 흠, “새로운” 이름이라. 애초에 옛 이름이 있었나?

아, 아르케아가 너에게 준 이름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야”. 아주 멋진 이름이야.
 
 
 
 
 
마야, 넌 네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니?
아르케아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걸 말이야.

"다르다"라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첫째, 다른 아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
둘째,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강인하다”라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강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야. 이 끝없는 기적의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기적은 바로 너일지도 몰라.

뭐, 그렇게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말이야.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아르케아란 언제나 밝은 장소였지. 보이지 않는 태양이 만물을 비추며 끝없는 낮을 이어갔어.

하지만 너는 밤의 세계에서 눈을 떴지.

온통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계. 그럼에도 너는 용감하게 미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어. 아니,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걸까? 어찌 됐든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

아르케아는 한 쌍의 거울과 같아. 죽은 자들의 세계면서도, 새로운 생명을 나눠주는 세계. 잊혔지만, 빛과 대립의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 낮이자, 동시에 밤인 세계.

다른 세계는 기억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

“아르케아”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그렇게 느끼는 걸까...?

 

지난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에 가치는 있는 걸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 닫힌 세계에 가치는 있는 걸까?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그리고 너에게도.

네가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아르케아에 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떼처럼 몰려와 너에게 슬픈 기억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뭘까?

그 모든 것을 겪은 네가 빛과 어둠 사이에 서게 됐을 땐 무슨 잔인한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지.

하지만 있잖아. 사실 이 질문들에는 아주, 아주 간단한 비밀의 해답이 있어.

 

아르케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라는 것.

간단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경탄스러워.
마야, 너는 진즉에 눈치챘지?

아르케아는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슬픔과 공포를 느낄 때면 포근한 옛이야기로 너를 달래주려 했어. 너는 그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은 빛을 향해 걸어갔지! 시적일 정도로 감동적이야! 의미로 가득 차 있어! 아주 훌륭한 쇼였어!

부서진 마음을 지닌 세계가 이토록 멋진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니...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격통을 겪으며 주저앉았던 너! 네가 편해지길 바라든 고통을 바라든, 아르케아는 네 소원을 들어주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바뀌었지! 아니, 진즉에 바뀌었었나? 언제 바뀐 거지? 확실하지 않군...

뭐, 아무튼 간에... 천국으로 향하는 그림자 드리운 길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고, 너는 그 길을 걸어갔지!

넌 마음 속의 죄악감을 똑바로 마주하고 빛을 향해 나아갔어.

아아... 어찌나 이기적인 짓인지... 너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그 모습은 숭고하며, 운명적...

이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결정했지,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마야, 자기야, 우리가 아직 면대 면으로 만난 적이 없다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니? 난 있지, 어째서인지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게 짜증 나. 그런 기분만 들고 너에 대해 진짜로 아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말이야. 너처럼 흥미로운 사람은 난생처음 봤는데 말이지!

있잖아. 난 인어를 찾으려고 하늘에 떠있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탐험한 적도 있어. 책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거든.

뭐, 정작 실제로 인어를 찾고 나니 그다지 재미없는 족속들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지만…

마야, 난 네 이름도 알고, 네 마음씨가 어떤지도, 네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도 알아. 네가 아직 슬픔에 젖어있다는 것도 알고, 네가 잠에 들 때면 과거에 “네가” 저지른 일이 여전히 너를 괴롭힌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책임이 아닌데 왜 슬퍼해야 하지? 너무 잔혹한 일이야! 이 모든 책임이 다 “너”한테 있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뻔뻔하기 그지없어!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
 
 
 
 
 
 
마야, 난 널 쭉 지켜보았어. 수많은 현실에 뿌려놓은 나의 눈으로 말이야. 도저히 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

아르케아의 과거나 역사조차 너만큼 흥미롭지는 못했어. 물론, 내 흥미를 돋운 건 “너”뿐만이 아니라, 네가 “두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지. 말했잖아? 두 빛깔이 어울린다고. 머리칼도, 눈동자도 두 색채를 품고 있는 너...

마야, 너는 한 사람이 아니야. 넌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어.

너 같은 걸 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너는 이 기적과도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이야.

내 고향 바깥의 세상에서 기적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야.

고향에선 모든 사람이 기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하지만 난 거길 떠나왔어. 거기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거든. 자장가이자 예언이었지. 그게 어지간히 불길했어야지.

그래서 그냥 고향을 버리고 나왔어. 언젠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이 쥔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을 찾으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갈게. 너와 다른 한쪽의 아이를 찾아서.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 그게 무슨 뜻이냐고?
노래를 하나 해줄게.

“천사는 없네. 오로지 이 곳에,
우리의 사랑과 조각이 있을 뿐이네.
우린 함께 빚어낸다네, 영원히.

어디서든. 하늘과 땅과 바다에,
그대를 안으리 내 품에.
그 기묘한 빛이 우릴 찾을지라도, 영원히.”

슬픈 노래지. 이런 노랠 들으면 누구든 기분이 착잡해질걸.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아르케아 이야기나 다시 하자고.

그 창백한 땅을 걷는 소녀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지금은 그렇게 창백하진 않나... 아무튼, 아르케아는 내가 그쪽으로 건너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마야.

하지만 유감인걸. 아르케아는 약해. 무능하고 약해빠졌어.
나는 아르케아로 찾아갈 거고, 그곳에서 존재할 거고, 살아갈 거야.

그리고 그 세계에 세 번째 변화를 불러올 거야.

내가 갈게. 설령 싸우다가 피부가죽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에게 갈게.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오로지 마야, 너의 말만을 들을 거야.

 

 
 
 

별빛의 바다와 폭풍우 치는 하늘을 건넜어. 시공간을 비틀고 수없이 많은 현실을 파괴했어. 마야!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이것 참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여행 도중에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거든. 노래하길 좋아하는 너의 그 목소리를... 노래 좋아하는 거 맞지? 항상 흥얼거리길래.

너의 노래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마야. 진실한 기억으로 벅차오르는 그 노랫소리를...

마야,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내 영혼은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나는, 나의 사랑은 내 존재 그 자체야.

오래전에 죽어버린 창조자와 절대자들과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우주와 세계들을 나는 너무나 사랑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영혼들조차 사랑해서 밖으로 가져와버릴 때도 있다니까! 그게 여태까지 총 몇 명이더라...?
잊어버렸어.

아아, 그리고 마침내 오늘... 오늘! 너를 만날 수 있어!

거인의 눈처럼 빛바랜 백색의 대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갈 테니까.

 

거대한 이불 같은 아르케아의 하얀 하늘이 점점 더 가까워져. 그 표면을 “기억”이 기어다니고 있어. 마치 반짝이는 모래같아. 난 그 하늘을 쥐어잡고, 파고들어가려 했어.

아르케아는 나를 밀어냈어. 빛과 구름이 대기권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마치 덩굴처럼 휘감았어. 내가 아무리 숨을 쉴 공기를 만들어내도 계속해서 사라져버렸어.

아르케아는 내가 들어오는 게 너무너무 싫나봐.
사나운 빛과 구름의 덩굴이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였어.

이런 이런… “법칙”은 사라진 게 아니었나? 아르케아야... 너에겐 아직 마음이 있는 거니? 그렇다면 어지간히도 나를 미워하는 모양이구나.

내가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거니? 그럼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는걸...!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안으로 들어가야겠으니까!

 

조만간이야... 얼마 안 남았어.

아르케아의 땅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소환했어.

이 장면은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거든.

무대 입장이라는 건 장엄하고 웅장한 법이니까.

만물이여, 목도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망을!

 
 
 
 
 

 
 

Arghena

 
하늘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냈어. 도자기를 빚어낸 듯 광활한 하늘 자체가 아래로 흐르는 모양새가 되었지. 그리고 갑자기 모양이 뒤틀리더니 온 하늘에 수없이 많은 색채를 흩뿌렸어.

번쩍거리며 땅을 향해 흘러 내려가는 총천연색의 대혼돈!

순수했던 백색의 빛이 무지개보다 다양한 빛깔로 일렁였어.

색이여! 강렬히 스며드는 미지의 색이여!

그래. 바로 지금이야. 바로 이 순간! 폭풍을 일으키자!
 
 
 

마야가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이윽고 하늘이 붉은색으로 물들었어.

그러더니 색이 또 바뀌더니...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어! 마침내 내 손이 하늘을 뚫고 나왔어.

세차게 부는 천둥번개와 비바람! 폭풍이다. 폭풍이야! 바람이 첨탑과 벽을 무너뜨리고, 눈과 얼음이 대지를 뒤덮고,
나의 색채로 물든 하늘이 파문을 일으키며 나를 감쌌어.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강림했어. 요동치는 공기와, 박동하는 생명과, 휘몰아치는 날씨와 함께.

하늘에 그렇게 큰 상처는 내지 않았으니 좀 봐줘, 히히...

내가 불러온 혼돈과 폭풍 한가운데에 서있는 너. 그 앞에 나는 가볍게 착지했어. 물론, 나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몸이니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지.

강한 돌풍에 우리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와중에 나는 입을 열었어.

“안녕, 안녕! 마야!

너무 만나고 싶었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에게 다가가 그 몸을 품에 안으며 온기를 느꼈어.

너의 어깨... 너의 허리...
너의 배, 너의 옆구리, 너의 손끝, 너의 찰랑이는 머릿결... 아아...
어머, 뭘 떨고 있니? 그냥 보는 것뿐인데.

후후, 그래. 얼굴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난 울고 있는 네 얼굴에 부드렇게 손을 올렸어.

그 울먹이는 두 색채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있지. 네 붉은 쪽 눈을 뽑아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특히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눈이니까...

물론 정말로 그런 짓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누구에게서 가져온 눈인지 확인만 좀 할게.

마야,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니? 안 그래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수수께끼라니.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

난 네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다른 쪽의 손을 튕겨 시간을 멈췄어.
 
 

잘 들어, 마야, 모든 세계에는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라는 게 있어. 하지만 아르케아는 예외라는 걸 난 진즉 알고 있었어.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아르케아는 “사상”이 아니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외 없이 모든 세계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난 오래전에 발견했거든.

겉면 층에는 표면 세계, 그 밑에는 규칙의 세계, 그리고 그 밑 가장 깊은 곳에는 “소원의 씨앗”과 거기에서 뻗어져 나온 욕망이 마치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어.

그런데 시간을 멈추고 아르케아의 층들을 둘러보았더니,
역시 내 가설이 정답이었던 모양이야. 아르케아는 현실 구조는 다른 세계들과 같은 “천”이 아니야.

그보다는 바다에 가깝지. 아르케아의 현실 구조는 계속해서 변화해. 마치 감정처럼 말이지. 고요했다가, 화를 냈다가, 우울해졌다가, 평온해졌다가…

밑물과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잦아들어.
 
 

보통 어떤 세계든 두 번째 층은 규칙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선으로 수놓아져 있는 법인데...

아르케아의 두 번째 층은 아무것도 없는, 황금빛과 청록빛으로 이루어진 텅 빈 공간이었어.

유일하게 찾을 수 있었던 법칙의 선은 세 번째 층의 새까만 캔버스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그린 듯한 “열망”이었어.

슬픔과... 희망으로 차있는. 이 세계를 정의하는 개념은 이 두 가지 뿐인 거야.

그리고 마야,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이 세계도 사랑하게 되었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난 여기서 내 힘을 더 발휘하기 쉽도록 새로운 규칙을 써넣으려고 했어. 그런데 아르케아가 날 또 거부하는 거 아니니? 왜지? 이러면 내 권역을 펼치기 힘들어지잖아.

내 팔과 손가락이 굳었어. 아르케아는 내 존재마저도 덮어쓰고 싶은 모양이야. 어느 정도는 성공했어. 내 팔이 총천연색의 빛깔로 흩어지더니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거든. 멈추었던 시간조차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

이런, 마야에게 아주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게 되겠네.

미안해.

아르케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이 현실에서 떼어놓으려 했어. 시공간으로부터 내 몸을 잘라내려 했어.

하지만 마야,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어떤 폭풍이든, 어떤 병이든, 어떤 압도적인 힘이든 너를 위해서라면 모두 극복할 수 있어.

날카로운 고통과 메스꺼운 감각이 내 몸을 덮쳤어. 내가 서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헷갈려. 백주 대낮에 어두운 방에 갇힌 환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어.

나는 잃어버린 팔을 다시 소환해 붙이고선 아르케아를 향해 손을 뻗었어.
닿아라… 닿아, 닿아!

“나”를 인정해라!
기억의 세계여! 그대는 나를 잊을 수 없을지어다!

나는 아르케아의 현실에 가장 아름다운 선을 새겨 넣었어.
나의 소중하고 거룩한, 진짜 이름을.

이걸로 됐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이 세계에 불러온 거야. 나는 영원히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어.

그 영원의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는 시공간을 비틀어 “나의 공간”으로 가는 관문을 열었어. 검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관문이었지. 그리고 부드럽게 너를... 아직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어있는 너의 손을 잡아 이끌었어.
 

 
 
그리고 너는 풀어헤쳐지기 시작했어. 말 그대로.

너의 손 끝이 관문에 닿자 유리의 실로 변해 흐트러졌어.

손부터 팔, 가슴과 몸이 아름다운 은빛 실로 변해갔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는 일 없이 너는 피부부터 내장까지 광휘를 발하는 실이 되어 서서히 흐트러져갔어.

그렇게 너는, 내가 열어젖힌 어두운 관문을 지나갔어.

너의 그 모습은 마치 녹아내리는 하프같아. 순수하고 아름다운 백색의 현이 천천히 풀려가는...

아아...
마야, 멋진 곳으로 떠나렴...

그리고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려무나.


너를 이루던 마지막 실이 관문을 지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관문을 닫았어.
 
 
 

하늘에 다시 백색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폭풍이 가라앉고 있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그리고, 나를 증오하는 이 세계에 다시 한마디를 건넸지.

“아르케아, 아르케아야...”

“만나서 반가워.”
 
 
 
 

 
 
내가 일으켰던 폭풍이 마침내 멎고, 하늘에 남아있던 색채의 잔재가 사라져 본래의 새하얀 하늘로 돌아왔어.

하지만 난 아직 여기 남아있지. 아르케아의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여기 서있단 말씀이야.

정말이지 괴로울 정도로 긴 여행이었어.
 
 

하지만... 마침내 도착했어. 여러 세계를 건너다 그냥 한 번 눈길을 줬을 뿐이었던 세계에, 내가 당도했어.

심지어는 여기 눌러앉아 버릴지도 몰라.

있지, 이 세계는 아주 심하게 망가져있어. 그럼에도 존재한단 말이지. 아주 놀라운 일이야. 이렇게 서툰 솜씨로, 이렇게 위대하게 빚어낸 세계는 본 적이 없어.

좀 더 파고들고 싶어. 좀 더 알고 싶어. 좀 더 배우고 싶어. 이 세계에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전부 찾아내고 싶어! 누구는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삶이던가? 너무, 너무 굉장해! 세 삶 모두 훌륭한 스토리야!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렇게 생각했어. 빗물이 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두 팔로 나를 감싸 안고 배와 얼굴이 아파올 때까지 웃었어!
 
 

왜냐니? 웃기잖아! 웃길 정도로 유감이잖아!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게! 그래. 아주 잠시 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
찰나의 순간 이 세계는 완벽했다가근본부터 다시 깨져버렸어! 지금은 다들 분명 근심이 가득하겠지?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혀!

바스라져 가는 슬프고 멋진 세계여. 그대는 축복받았도다!

나의 존재로, 나의 섭리로, 그대들은 다시 행복을 찾을지어니.

신이 강림했노라.

내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려놓을 것이니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 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 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전날 밤의 일이야.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 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란...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 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 행성에서 도망쳐 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 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

...음?

그 아이의... 또다른 기억인가?

흐음, 이젠 이 애의 기억들은 다 나한테 이끌리는 가봐.

그렇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칙도 있는 법이네...

음... 이 기억은...
두 번째... 삶? 영혼의 "복제" 과정인가... 이게 왜 기록되어 있지?

아르케아는... 그 하얀 여자애에게만 흥미가 있는 게 아니었나?

...하긴, 이 세계에 일관성 따윈 없다는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 어쩌다 일어난 일인가봐.

아니... 아니, 어쩌면... 아르케아가 이 기억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지도. 잘 봐.
뭔가 잘못된 것 같거든.

아르케아로 누군가 도착하는 모습을 공허에 있을 때 너랑 함께 몇 번 보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 아이의 기억은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지지도, 흩어져 사라져버리지도 않았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뭉쳐있을 뿐인걸... 왜지?
마치 세계의 경계에 갇혀버린 그 아이의 영혼 같아...

보통 상황에서는 이런 에너지 덩어리에 불과한 걸 영혼이라 할 수는 없겠지...

아르케아도 이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걸까? 왜 유리 조각으로 만들지 않고...

...아아, 완성된 게 이 모습이란 건가. 우리에게 남겨진 또다른 수수께끼네.

이 버려진 기억들. 어떻게 된걸까? 어떻게 생각해, 카론? 나는...

...으음, 여전히 말이 없구나. 말하는 능력을 줄 걸 그랬네.
하지만 이걸로 그걸 설명할 수 있겠네.

아르케아에 오는 아이들의 옷은 거의 항상 바뀌지만, 몸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잖아?

그런데 왜 비타는 머리 반쪽이 새하얗고 한쪽 눈동자 색이 다른지 궁금했거든.

이 기억을 보니 이제야 알겠어.
아, 이제 기억이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야... 아니, 가져가진 않을 거야.

기억을 모았다가는 낭패당할 수도 있으니까.

"잊혀진 기억"에 대해서는 흥미가 동하긴 하네.

어쩌면 공허로 간 걸지도. 아니면, 애초에 기억이 아닌 건가...? 흐으으음...
여기서 더 고민해서 뭐하겠어. 움직이자.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여기서도 흔하지 않으니까.


흐릿하게, 어렴풋하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인상뿐.

기적일까, 아니면 축복일까.

쏟아져내리는 지옥의 업화와 같은 풍경의 흔적마저도 곧 잊히고 말았다.

숨 막히는 열기, 녹아내리는 뼈,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우주선, 무너지는 요새, 타오르는 화염,
사방을 메우는 비명소리… 끔찍한 공포, 모든 것이 잊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한 기억과 함께.

 
 
 

한 기억의 편린…
비타가 작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책은 화면이 달린 기기의 편리함에 밀려 이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는 종이를 만지는 촉감, 그리고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을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 마음에 들어 했다.

모두가 같은 군복을 입고 있어도, 자신만은 특별한 듯한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많은 것에 자부심을 지닌 비타였으나 종이책을 읽을 때면 특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휴게실에서 비타가 안락의자에 앉아 작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친구가 다가와 등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어디서 맨날 그런걸 갖고 오냐?"

비타는 기지를 나가 조금 걸어가면 늙은 여인이 낡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젠가 외출 허가를 받아 그 가게에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 약속했다.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비타의 끔찍한 실수로 말미암아 기지의 인원은 모두 몰살당했다.

이 모든 것이, 잊혔다.
 
 
눈가에 물이 맺힌 채로 비타가 깨어났다. 그리고 비타로부터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나왔다.

백색의 세계를 덮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물게도 아주 어린 소녀가, 아르케아로 찾아왔다.

비타는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은 꿈의 흔적까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깨어나라, 비타. 빛의 세계의 어둠 아래에서 깨어나라.

너 또한 수많은 소녀들과 함께 축복을 안고 있으니.

 
 
 

이 어린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 유리와 폐허의 세계를 덮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을 따라가보자.

만물의 끝을 향해, 소녀를 따라가보자.

소녀는 여행하고, 보고, 사랑하고, 배우리라.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아르케아의 대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를 넘어 뻗쳐있다.

원반 모양의 대지 위를 들판과 산맥과 메마른 바다가 수놓고 있다.

이 원반은 지금도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별이 떨어지며 하늘을 반쪽으로 갈라 대지의 절반에는 더 이상 햇볕이 내리쬐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햇빛을 머금었던 구름이 대지의 절반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의 끝자락에는 그림자로 가득 찬 공허가 있으며, 그 공허는 형용할 수 없는 종말로 이어지는 통로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모르는 비타는 아르케아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 기둥에 손을 얹은 채 별들을 바라보았다.

 
 
 
 

아르케아에는 바람이 분다. 하지만 비와 눈이 내리지 않고, 물도 한 방울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올 뿐이다. 산들바람이 비타의 머릿결 사이를 스쳤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별을 담았다.

"별들이… 보랏빛이네."

마침내 연 입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아르케아의 별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별은… 하얀색인데… 지상에선 별의 색을… 볼 수 없으니까. 우주에서만…"

 
 
 

비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저건… 정말로 '우주'인가?"

여기는 유리 조각이 공중에 떠다니는 동화와 같은 세계이니,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이었다.

비타는 비록 자신의 이름 외에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으나, '지식'만큼은 지니고 있었다.

보통 세계가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 요소와 이 세계 '아르케아'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아르케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비타는 자신에게도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들어 심장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거지…?"

 
 
 

아르케아를 방문한 이들을 절대 혼자 두지 않는 유리 조각들. 그 안에는 다른 세계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비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그를 통해 비타는 어떤 세계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아르케아에도 언젠가 사람이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타는 자신의 옆에 우뚝 선 기둥을 바라보았다.

비타가 서있는 곳은 밤의 장막으로 뒤덮인 폐허. 새하얗게 금이 가 텅 빈 건물들의 모습은 마치 수십 마리 용이 누워 백골이 되어버린 무덤과 같았다.

비타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뜻하는 증거였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마음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비타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공유했던, 연결되어있다는 그 감각.

이건 모든 인간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각인 걸까?

비타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비타는 창백한 돌기둥으로부터 걸음을 떼 폐허를 지나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계엔 비타밖에 없는 것이 명확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비타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졸립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타는 납득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듣길 바라며 크게 목소리를 울렸다.

 
 
 

먼지로 뒤덮인 계곡과 다리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렀다. 자신을 따라오는 아르케아가 발하는 조그마한 빛으로 칠흑 같은 밤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폐허 사이로 발을 옮겼다.

아르케아 안에 담긴 기억과 풍경은 그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어딘지도 모를 풍경의 환상보다는 바로 지금 서있는 현실이 더 중요했다.

비타는 바람을 느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바다, 또는 거대한 호수, 또는 대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물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며, 달이 있다는 뜻이고, 어쩌면 태양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춥지는 않으니… 태양은 분명히 있다.

이 가설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비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타는 안락한 가설들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작게 속삭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그 결의는 보답받게 된다.
 

 

운명이 아르케아를 지배하던 때였으나 이는 운명이 아니었다. 정동이 아르케아에 만연하던 때였으나 비타의 염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어떨 때엔, 오로지 시도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법이다. 비타가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자 그곳에 보인 것은 바다가 아닌, 태양이었다.

"오… 우와… 저게…"

놀라움과 순수한 경이로 눈을 반짝이며 비타가 속삭였다. 하늘을 수놓으며 춤추는 유리조각,

진정한 빛의 세계.
눈부신 구름이 덮은 하늘 아래로 낮과 밤이 만나 뒤섞이는 경계가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면의 '소녀'를 거부하던 비타였으나, 눈앞에 보인 풍경에 결국 체면 따위 집어던지고 등 뒤로 펼쳐진 밤의 풍경을 한 번 돌아본 뒤 신이 난 얼굴로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이게… 이게 대체 뭐지?! 너무… 신기하다!"

조용한 세계에 비타의 흥분한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으나 그 누구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비타는 낮과 밤의 경계를 눈앞에 두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과 일광이 부딪히며 자아내는 은빛 커튼을 바라보았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신이 나서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경계를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 주변의 바위나 폐허 위에 올라갔다.

비타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비타를 채운 경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경계 그 자체와, '밤'쪽에서 바라보는 '낮'의 기이한 풍경을 모두 관찰하고나자 비타는 아르케아의 밝은 쪽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찾아냈다.
대성당과 투기장, 호숫가 별장과 줄이 늘어선 기둥들…

경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타는 새로운 풍경과 발견, 그리고 모험과 탐험을 즐겼다.

하지만, 마음을 가득 채우던 경이감이 일단 사라지기 시작할 때면…

처음엔 조금씩, 하지만 이윽고 격렬히,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날 때면…
…불안이 비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낮과 밤, 폐허, 드넓은 공터. 비타의 머릿속은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너무나도 무거운 염려와 생각을 안은 채 비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 나밖에 없는 거야…? 아니지…?"

가슴속에 똬리를 튼 불안은 곧 공포심으로 바뀌어, 비타는 또다시 누군가를 부르듯 소리를 크게 질렀다.

하지만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아르케아의 대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를 넘어 뻗쳐있다.

그 구석구석까지 목소리가 닿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세계에서 깨어나서 평생 다른 사람과 만나기는커녕, 자신 외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조용한 골목길과 텅 빈 동굴을 향해 비타가 "저기요!". "누구 있어요?" 하고 소리칠 때마다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그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윽고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적인 감각이 비타를 엄습했다. 비타는 이 세계의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운명을 알게 되었다.

평생을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그리고 이 소녀조차, 이 조그마한 아이조차…
…시간은 무심하다는 공포스러운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방랑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마음에 품었던 희망이 찌꺼기만 남아버렸을 때쯤, 어린 소녀 비타는 보는 사람 따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모습을 숨기려는 듯 흔해빠진 폐허의 구석으로 기어가 울고 있었다.

 
 
 
 

꺼윽거리며 울었다. 고통에 신음했다. "아니야." "싫어, 싫어."라 중얼거리며 무릎을 껴안고 울었다.

소매의 심장 모양 잎새가 눈물로 넘쳐흘렀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과 끔찍한 진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의 울음소리에 묻혀, 비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 여자가 빛을 등지고 걸어나왔다.

마지막으로 내디딘 걸음의 또각, 하는 소리가 마침내 비타의 귀에 닿았다.

비타는 두려움이 번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역광 탓에 여자의 모습은 칠흑으로 감싸여 있었다. 얼굴 오른쪽,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빛을 반사해 그림자를 뚫고 반짝였다.

안경인 걸까? 비타가 고개를 더 높이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왼눈을 깜빡이는 얼굴이 있었다.

숨이 목구멍에 턱 하고 걸렸다.

사람, 애타게 찾던 사람이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 눈에 꽃이 피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른 저녁,
태양이 저물며 붉은 황혼의 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초원을 둘러싼 장치들은 그 빛을 흡수해, 달빛과도 같은 색의 광선으로 탈바꿈시켰다.

파티장에는 어떤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저택 밖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하나, 상류층에게 이미지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여자는 그걸 처음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햇빛으로 만들어진 조명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방에 앉아 조용히 그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라비니아.”

여자가 술잔에서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약혼자였다. 그는 답답해 보일 정도로 잘 차려입었으나, 몸짓에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은 뭐 마시고 있어?”

“안녕… 도노반, 자두 주스야.”

여자가 멀쩡한 쪽의 눈으로 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 골랐네.”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하고선 방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나 친척들은 크랜베리가 더 좋다고 하시더라... 건강에 더 좋다나. 그런데...”

남자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맛이 써서 난 별로야. 너도 그렇지?”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 표정을 찡그렸다.

“나도 안 좋아해.”

“그럴 줄 알았어.”

남자가 한 번 웃더니 등을 돌렸다.

“난 모건이랑 이야기하고 있을게. 나중에 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벽난로 옆에 서 있는 소꿉친구에게 다가갔다.

 
 
 
 

저택의 풍경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은 먼 거리를 가지 못하고 바닥에 설치된 조명장치로 흡수되었다. 이 때문에 방은 조금 어두웠지만 어딘가 포근하고 안도감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들은 간신히 책을 읽을 정도, 또는 사람의 표정을 보거나 테이블 위의 음식과 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빛나고 있었다.

반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방 밖의 풍경은 이른 밤의 푸르름을 감싼 야생화, 바위, 그리고 강이 꾸미고 있었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은 약 스무 명, 그중 반은 이 방에 있고, 나머지는 홀, 또는 서재에 있을 것이다.

여자는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주스를 음미했다. 자두 주스를 마셔본 적은 별로 없었기에, 단 맛 이외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마셨던 더 맛있는 음료가 생각나지만, 혀 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보았다.

그럼에도 주스의 맛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이게 싫은지 좋은지조차 정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고급스러운 잔 받침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백색소음과 같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방의 풍경을 감상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오른 눈에서 피어난 꽃의 잎을 만져보았다.

 
 
 

“이미 꽤 진행된 모양이야. 처음 그 소식 들었을 땐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도노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찰스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모건이 아닌 나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지 않아?” 도노반이 머리 위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다니.” 그가 말한다. “인류는 대단해.”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는 조명의 불빛을 보았다가, 약혼자를 찾았다.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지극하게 평범한 맛이었다.

“인공 세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기에 그다지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애초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곤 여자에겐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짜증이 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내심이 떨어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빛으로 물들어 조금 더 화려해진 홀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 저택의 방들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저택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꺼진 칠흑 같은 복도, 열쇠구멍이 없지만 잠겨있는 문들. 잠겨있지 않은 방 안에는 남녀 몇 명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들은 한 번 눈길을 슥 주고는 다시 대화로 돌아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택은 최신 기술의 보고와 같았으나, 동시에 낡아빠진 계급 의식을 표출하는 출구이기도 하였다. 빛 흡수 장치나 인공 자연도 놀라운 기술이었지만, 여자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정원의 빛 변환 장치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궁금했다”.

파티 손님들과 한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질법한 따분하고 시답잖은 대화나 하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삶을 둘러싼 생명과 그 창조물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정문으로 걸어가는 순간…

그 손이 문고리에 닿자마자…

깨달았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그녀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다.

여자의 자리는 기계장치들을 감상할 수 있는 초원이 아니라 약혼자의 옆, 이 저택의 방 안이었다.

“바깥”이란건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이런건 깨닫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샹들리에 밑에 섰다. 샹들리에의 조각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그녀가 가볼 수 없는 장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흐릿한, 거의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빛이 샹들리에 주변을 감싸며 비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내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새로이 생겨난 조그마한 불만의 불씨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저택의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반 유리 벽 너머로 폭풍 바람에 꽃잎들이 휘날렸다.

눈을 사로잡는 백색과 사파이어색의 빛.
파티의 젊은 손님들이 풍경의 변화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마법같이 신기하다.

여자도 라운지로 돌아와 인공 자연 풍경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감상했다.

화려한 연극이다.

저 흩날리는 꽃잎들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하다가,
이제 “기억” 하는 것조차 질린 듯 눈을 감는다.

여자는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시험했다.

창문은 잠겼고, 뒷문에는 빗장이 걸려있었으며, 환풍구는 막혀있었다.
이에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누군가 이 통로들을 막은 걸까? 아니면 내가 여기에 갇혀있기 때문에 막힌 걸까?”

비유와 감상은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알기는 힘들었지만.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후,
여자는 지인 또는 친구로서 알고 있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씨가...”
“국왕 전하께서...”
“지난주에...”

지루하고, 아무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
질문을 해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자의 흥미 분야인 공학, 기술,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손님들에게서 한 조각의 흥미도 끌어내지 못했다.

짜증이 난 여자는 아무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기로만 했는데, 이윽고 이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냥 흙공 같은 모양인데, 곧 테라포밍 할 거라더군.”

그 말에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자는 다시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서서, 폭풍을 바라보며, 교감했다. 저 폭풍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자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약혼자 옆을 지나갔다.

“라비니아, 어디 갔다 왔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낌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항상 그랬다.
눈에 띄고 특출난 것엔 관심이 없다.

여자가 아무리 대담한 짓을 해도, 언제나 자신들의 루틴을 따를 뿐이었다.

사교 파티라는 좋은 그림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는 묻고 싶어서 더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질문을 내놓기로 했다.

“그 인공 세계란 거... 혹시 유리로 만들어진 거 아니야?”

“음? 그게 무슨... 당연히 아니지. 싸구려 장식도 아니고.”

여자의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작아졌다.

찾았다.

도노반은 여자의 어깨 너머, 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아름답지? 꼭 당신처럼...”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답변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꽃의 소용돌이가 고요하게 휘몰아치는 동안,
여자는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가, 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세계에선 이런 멋진 쇼가 끝없는 골짜기에서 펼쳐질 거라더군.
지금은 황량한 폐허이지만 말이야.”
도노반이 계속 말했다.

여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물건의 손잡이를 잡았다.

“객석을 하나 잡을 수만 있으면, 정말 훌륭한 경험이 될거야.
거기다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라고.”

여자가 숨을 내뱉었다. 이번 여정도 의미가 없었다.
매끈한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등을 돌려 약혼자에게 다가가,
그 목으로 손에 쥔 것을 휘둘렀다.

빵칼의 날이 목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단 한 줌의 적대감조차 지니지 않은 채,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목을 베고,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조심히 살펴보았다.
 
 
 

피가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남자의 목이 끔찍하게 잘렸으나… 이 기억에는 “끔찍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여자의 눈앞엔 피로 흥건한 끔찍한 광경이 아니라, 잘려서 구겨진 종이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의 목이 있었다.

그 안은 “그림자”가 아닌 “무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채우고 있었다. 상처의 끝부분은 희미하게 하얀색으로 빛났고, 여자가 든 칼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부유했다.

도노반을 포함한 파티 손님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여자들은 기절하며, 도노반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몇몇 남자가 여자에게 달려들어 팔과 목을 잡아 제압했다. >여자는 칼을 강하게 쥐고, 무표정으로 약혼자의 놀란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은 여자는, 도노반 뒤에서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뒤틀리다가,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그 순간에 이미, 이 기억은 망가져있던 것이다.

 
 
 

이 기억의 원본은 이렇지 않았다. 시간의 풍파에 매우 달라져버린 기억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로운 파티에서, 예비 신부가 자신의 약혼자를 공격하다니...

여자는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므로, 지금 상황에 만족했다.

방 안의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인지조차 못했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기억 변조는 처음이었다.

최소한 성공이라 부를 수는 있을 정도의 성과였다.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바스러졌다. 공간이 구겨져 보일 정도로.

 
 
 

“휴양을 위해 세계를 하나 통째로 만들다니... 그것보다 훨씬 좋을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에 쥔 빵칼이 공중에 뜬 채 움직일 생각을 않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기억’도, ‘메아리’도, ‘반사상’도, 가장 중요한 ‘유리’도... 언급이 전혀 없었어.”

방이 줄어들었다.

“또 쓸모없는 꿈이었던 모양이네.”

행성이 갈라졌다.

 
 
 

풍경이 무너지며 하얀 빛이 사방에 나타나 눈을 쏘아붙였다. 이 기억에 존재했던 모든 소리가 한 번에 재생되었다.

여자는 그 유리 조각에서 눈을 감고 서서, 빛과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텅 빈 세계였다.

마음속으로 명하자,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의 파도가 그녀를 덮치고, 이윽고 소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가장 익숙하고, 가장 경멸스러웠던 세계.

하얀색 폐허의 세계. 아르케아, 기억의 세계였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는데.” 소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는 유리 조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기억에도 이 세계의 창조에 관련된 단서는 없었어. 기억을 볼 수 있다면, 없애버릴 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녀가 유리 조각을 떠나보내자 그것이 땅 위에 흐르는 반짝이는 강으로 돌아갔다.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을 쳐다보고서,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손을 대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전 기억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전에 방문했던 수천 개의 기억과 비교했다.

 
 

 
사야가 처음 깨어났던 날.

이 세계에서 깨어나는 이들은 누구도 그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보통과는 달랐다.
소녀의 마음이, 정열적으로 요동쳤다.

점점 격렬해지는 그 감정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자신의 복부를 덮은 옷을 꽉 쥐었다.
잠시 자신의 귀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눈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응...?”

소녀는 기침을 한 번 하고 일어섰다. 오른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져보자 장갑 낀 손 너머로 느껴진 것은, 단단한 물체를 감싼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소녀는 그제야 자기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몸을 살피며,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지 고민했다.

그다음 어째서 자기가 “옷”이라는 게 뭔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소녀는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주변은 그 벽과 같은 모양의, 하지만 심하게 부서진 벽이 3개 더 있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곳에 지붕은 없었다.

그리고 소녀는 왜 자신이 저 위에 지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실, 소녀는 이 장소를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대어 자고 있었던 벽을 따라 터덜터덜 걷다, 넘어갈 수 있을 만한 턱을 발견했다.

그곳에 쌓인 하얀 벽돌들을 넘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벽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이 세상은 낡고 패배한 인류 사회의 흔적, 또는 여러 사회를 모방한 장소였다.

기묘하다... 그보다 더, 이 세상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소녀 자신이 기묘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기억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 소녀는 이 장소와 자기 자신의 정체에 관해 수십 개의 이론을 내놓았다. 혼자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지나, 특히 그중 하나의 이론을 증명할 증거들을 찾아냈다.

 

 

 

소녀는 천성적으로 끈질기고 호기심이 많았다.
이 새하얀 세계는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일이 지나도, 이 폐허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주가 지나도, 기억의 유리 속에 답은 없었다.

이 세상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소녀를 놀리듯이, 이 세계보다 더욱 생생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인류 문명의 모방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를 인쇄해낸 듯한 메아리의 세계. 아마 두 달,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생길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소녀가 깨어난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층 꼭대기에서, 소녀는 하늘의 일부분이 물결치며 조각조각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관찰했다.

그 무엇도 비추지 않는 깨진 유리 창문 같았다. 그 실상은 수백 개의 아르케아가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그 순간, 소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증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관찰만으로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맹세했다. 질문만 던지고 답은 주지 않는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존재 목적을 찾아내겠노라고.

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으로서, 그것이 소녀의 첫 번째 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아르케아를 받아들였고,

아르케아도 소녀를 받아들였다.

드넓고 무한한 기억의 세계를, 단지 관찰할 뿐 아니라, 살아갈 것이다.
 
 
 
“이 세계들에선 인간은 거의 신과 같아.”

소녀는 그걸 깨달았다.

오른 눈에 꽃이 핀 소녀가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던 기억의 표지를 다시 덮었다. 완전히 무의미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거의 무의미했을 뿐.

처음엔 짜증이 났다. 그 세계는 아주 시시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시시함 덕분에 인류의 잠재성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법”에 대한 이론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이번 여정 또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적어도 그 일부라도 붙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녀를 앞으로 향하게 만들어주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200개쯤 보았을 때, 다른 목적이 생겨났다.

 

 

 

“이론을 재구축해버릴 만큼 새로운 건 없었어.”

소녀가 유리 조각의 강으로부터 한 조각을 불러오며 속삭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정보는 얻었지.”

소녀는 그 조각의 빛을 바라보며, 그 너머에 비추어지고 있는 과거의 영상을 살폈다.

“거의 다 왔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소녀는 손 위에 조각을 올리고서, 이젠 익숙해진 다리를 건넜다. 왼쪽으로는 한때 도시였을 건물들이 중구난방으로 무너져있고, 오른쪽으로는 유리와 돌이 혼란스럽게 섞여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따라 “태어났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소녀는 오랫동안 걷다, 네 개의 무너진 벽 사이로 반짝이는 커다란 유리 구체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 구체는 만들어지다 만 듯, 깨진 조개껍질과 같이 부서져있었다. 웃음, 눈물, 죽음, 그리고 축제의 기억이 구체의 일부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꽃과 들판, 사막과 바다, 동물과 사람, 그리고 기계... 그런 기억들이 구체를 채웠다.

 

 

 

 

기억을 서로 이어 붙인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는 소녀도 몰랐다. 이렇게 갖다 붙인다고 해서 기억끼리 “연결”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 가져온 조각의 빛을 보았다.

“너는 얼마나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소녀가 말한다.

그렇게 조각이 열리고, 소녀는 새로운 시간대로 들어갔다. 곧, 인공조명과, 저녁놀로 물든 하늘에 뜬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탑과, 공중을 나는 차량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마주했다.

불쾌한 공기가 폐를, 불협화음이 귀를 엄습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과거를 지니게 된 소녀는, 감정 없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폈다.

수백 개의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무슨 일을 해야 하든, 반드시 그 답을 찾으리라.
 
 

 

절벽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생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은 소라게가 껍질을 버리듯 영혼을 두고 가는 법이며, 새로운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들의 정신은 머리 위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연못으로 승천한다.

마치 물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는 영혼들. 그 새하얀 영혼들이 하늘을 꿰뚫은 강렬한 색채의 연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회색으로만 가득 찬 세계에 비추는 형형색색의 빛깔.

이를 혹자가 보았다면 경이로운 광경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게 이는 일상의 풍경이자, 일감에 지나지 않았다.

 
 
 

“방금 왼쪽에서 뭔가 흔들렸나?”

소녀의 뒤쪽에서 동료가 물어왔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가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동료의 무릎 위에 얹혀 있는 넓고 얕은 검은색 그릇에는 물이 담겨있었다.

물 위에 물체를 떨어뜨려 그 파문으로 운명을 점치는, 일종의 주술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물 표면에 파문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막 점을 친 참이었다.

“아니, 왜? 뭔가 이상해?”

소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땅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아.” 남자가 말했다.

“이런... 좋지 않은데. 더 가까이 다가가볼까?”

“흠... 균열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는데, 한 번 가봐.”

“그래.”

소녀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빽빽하게 들어찬 영혼들 덕에 소녀는 천천히 낙하할 수 있었다. 소녀가 자신의 옷을 꽉 맞게 조이던 실을 찾아내 당기자 옷이 헐렁해지며 약한 빛을 발했다.

옷이 큰 소리를 내며 펄럭거리자 영혼들의 영향이 적어져 소녀의 낙하가 빨라졌다.

소녀는 착지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낫을 꺼내들어 펼쳤다. 그리고 날을 위로 향하게 뒤집은 뒤 밑동 위에 올라타,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균열 내에 갇힌 영혼들을 구슬려 빼낸 후 균열을 닫는 것.

다시 절벽으로 돌아와 또다른 이상이 생기는지 감시하는 것.

그것이 소녀의 임무였다. 매일이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자신의 때가 오면 소녀 또한 영혼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소녀의 때는 이미 왔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소녀가 알던 세상과 삶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죽음이라는 게 이래서는 안된다.

죽음이란 결말이다. “다음 생” 따위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고, 죽은 세계가 전부다.

소녀가 살아있을 적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모두 고대적 사람들이나 믿던 교훈적 허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도대체 뭘까? 소녀는 어째서 이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 걸까? 대체 뭘까? 대체 뭘까...

이제 와서 그 질문에 의미가 있긴 한가?

 

 

 

“흠...”

소녀는 등대 위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사막을 살펴보았다. 하얀색, 하얀색, 끝없는 하얀색... 그 사이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이었다.

소녀는 턱을 괴고 나른하게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다리가 있었다.

“휴우...”
소녀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일어서서 허리춤에서 낫을 꺼냈다. 낫은 소녀가 살아있을 때만큼 효과적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를 가르마의 반대편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가락 끝이 소녀의 왼쪽 뿔에 닿았다.

그래, 나에겐 뿔이 있었지...
여태껏 아르케아에서 본 어떤 기억에서도, 뿔이 달린 인간은 본 적 없었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유희라고는 그 유리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밖에 없었기에, 소녀는 아르케아를 들여다보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들을 분류했다. 마치 기록처럼.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녀와 같은 모습의 사람이 등장하는 기억은 없었다.

소녀와 같은 종족... 종족... 종족? 종족이라 해도 되는 걸까? 소녀는 살아있을 적 어떤 “민족”의 일원이었던 걸까?

살아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영혼들을 관리하는 민족의 일원이던 걸까?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생전의 기억을 좀 더 떠올린다면 예전의 자신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소녀가 집으로 삼은 장소에서 어떤 유리 조각이 사라졌고, 남았으며, 새로 생겼는지 기록해야 한다.

소녀는 등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일과를 준비했다.

 
 
 

낫은 여전히 잘 날았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듯 낫의 손잡이 위에 올라탄 소녀는 파괴된 거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날은 그녀의 뒤에 위를 향한 채 꼿꼿이 서있다가, 모서리를 돌 때마다 기울어졌다.
소녀는 낫을 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모양새였다.

소녀는 날아가는 도중 한 유리 조각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강처럼 도로를 따라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적어도 이 무리를 발견한 이후로 그 어떤 조각도 벗어나거나 새로 합류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기에, 소녀는 매일 이 조각의 무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리를 이루는 유리 조각에 변화는 없었다.

연극, 노래, 슬픔, 기묘하고 거대하며 재빠른 기계에 대한 기억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로 특이한 조합이다.

그 사실이 소녀에겐 매우 흥미로웠다.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억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물론 기억의 무리에서 특정한 기억 하나를 찾아내는 일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소녀에게 특별히 이끌리고 있었다.

한 유리 조각이 무리에서 벗어나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선, 낫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 기억에는 조그만 수제 피리가 만들어지는 최종 공정이 담겨 있었다. 악기를 완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장인은 이 마지막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을 위해.

장인이 플루트를 불어보았다. 그리고선 음이 안 맞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리는 났다.

 
 
 

이 기억은 한 기나긴 여정의 끝이기도 했고, 더욱 장대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순간을 포착한 기억이다.

무리 속의 다른 기억들 또한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은 소중하다.

사실, 소녀가 "소중하다"라고 생각하던 기억은 적어도 한 번쯤 그녀에게로 날아온 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 반려동물의 기억, 생존과 희생의 기억, 첫 말의 기억, 용기를 주는 연설의 기억, 중요하고 개인적인 대화의 기억...

가끔, 소녀가 기억의 무리 옆을 지나갈 때면,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그녀를 따라오곤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렇게 특별한 기억들이 한 장소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일은 따로 있었다.

아르케아의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다. 충치의 기억, 맛있는 식사의 기억, 승마의 기억, 우유를 엎지른 기억, 무엇이든, 기억되었다면 이 장소로 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하거나 특별한 기억 하나하나가 사람을 이룬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이란 어떤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기도 한다. 잊힌다는 것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소녀가 경험하고 있듯, 어쩌면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

소녀는 말없이 멈추어 서서 한때 광장이었을 장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선,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유리 조각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이 장소는 마치... 정원과 같았다. 정원을 이루는 “식물”들은 여기서 자라난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찌 됐든 이 정원을 가꾸었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집”으로 여기는 장소 주변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깨어났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흐음...”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유리 조각들을 모았다. 조각들은 보통 떠나진 않지만, 가끔 무리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소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아르케아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형태를 한 것에 이유는 있는 걸까?

...생전에, 소녀는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었다.
 
 
 
“음?”

아르케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 왜 생전의 기억이 떠올랐지...?

소녀의 머릿속에 마치 손님처럼 나타난 것은, 조그만 기억의 편린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이 난다. 어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래된 나무 두 그루 밑에 조용히 앉아있던 소녀와 동료. 영혼의 강은 아래로 떠내려갔고, 밤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순이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이 일을 반복해 봐. 매일매일...

영혼은 숫자로밖에 안 보이지. 많냐, 적냐. 그게 다라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인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인간성에 너무 매달려서,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하지만 이런 걸 너무 신경 쓰지 마.” 남자가 영혼의 강을 보며 소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정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테니까.

너, 글렌(Glen)에 갔을 때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소녀가 대답했다.

“역시, 다들 똑같이 대답한다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대답만 기억해. 그럼 괜찮을 거야.”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정신이 현재로 돌아왔다. 대답을 기억하라고?

대답... 대답... 내가 뭐라고 답했었지?

“기억이... 안 나.”

소녀가 약하게, 그러나 무겁게, 속삭였다.

남자가 욿았다. 소녀는 그걸 이제야 느꼈다. 슬픈 사실을 깨달아버린 소녀의 눈이 흐릿하고 따스한 애도의 색으로 차올랐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크게 조각나버린 기억은, 멋대로 질문을 던지고서 그 답은 주지 않았다. 소녀는 낙심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 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유리의 구름 아래에서 소녀는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울지 않을 것이다.

울 수는 없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무시하기로 했던 현실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아서. 소녀는 가만히, 그 자세로 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새하얀 세계에 홀로 웅크려앉은 사신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껴안았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는 동안, 피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만약,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라면...

소녀는 차라리 모든 것을 망각하길 바랄 것이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혼란은, 침묵을 가져왔다.
원래 말이 없던 그녀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져 며칠이고 이어졌다.

그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 소녀가 깨달은, 여태껏 지키려던 철칙이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옛 기억의 맛은 너무나 달콤했다. 소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해낸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자신이 반쪽짜리 인간임을 다시 깨닫게 될 뿐이었다.

이젠 그냥 잊어버리자.

 
 
 

소녀는 오늘도 형형색색의 기억들을 마을 광장으로 인도했다. 이 행위를 일과로, 습관으로, 결국은 본능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일만 반복하다 보면 마음속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절망의 구덩이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

감정을 가져서 느낄 수 있는 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뿐이라면, 차라리 모든 걸 잊어버리는 망각을 택하겠다.

아르케아 조각들을 이끄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서 반짝이던 어떤 조각에 눈이 갔다. 소녀는 별생각 없이, 그 조각을 가까이 끌어왔다.

그것에 비친 것은 길가에 쭈그려앉아 손으로 무언가를 감싼 아이의 모습이었다. 개미들이 아이의 손을 피해 갔다.

하지만 그 손이 감싸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신은 좀 더 집중해서 이 기억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숨기고 있던 것은 다친 딱정벌레였다. 잠시 생각한 후, 아이는 두 손에 딱정벌레를 담아 올렸다.

그게 기억의 전부였다.

 
 
 

소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얼마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억인가.

딱정벌레는 살아났나? 아이는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언제까지 이 일을 기억했을까?

바보같다...

소녀는 웃음을 내뱉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기억을 떠올림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 있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다니.

아르케아는 기억의 세계다. 죽은 자의 기억인지, 산 자의 기억인지. 그런 건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아르케아는 모두가 잊어버려도 좋을 법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곳이다.

영혼이, 몸이, 기념비가, 대지 그 자체가 소멸해버릴지라도,
어떻게든, 아르케아는 그들을 기록한다.

 
 
 

소녀는 여기선 혼자다. 동료도 곁에 없다. 깨어났을 때 무얼 하라고 시키는 이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다. 옛 삶은 끝났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다.

하지만 소녀에겐 아직 주체성이 남아있다. 아직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왜 영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반쪽짜리 자신도, 당시의 완전했던 자신과 같은 답을 내놓았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도 기억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다르다. 소녀 자신의 기억은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이 기억들은 그렇지 않다.

“영혼의 관리자”에서 “기억의 관리자”로.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그대들은, 내가 여기에 있는 한, 기억될 것이다.

영원히.

 

 

그 여자다. 틀림없다. 그 여자가 왔다.

레테는 낫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떠올리고서 각오를 다졌다.

그녀의 삶은 끝났을지라도, 의무는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유리로 반짝인다. 그녀가 무릎 꿇은 고원의 땅이 흔들린다. 이윽고 뿔 달린 사신은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구나.” 여자가 말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괜히 애쓰는군.” 레테가 대답했다.

“말은 아직 연습 중이야. 예전보단 꽤 잘하게 된 것 같은데.”

“별로. 여전히 못하는걸.” 레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없이 평온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지간히 싫나봐?”

레테는 말없이 낫을 꽉 쥐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유감이야…” 여자가 레테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는데.”

 

 

 

“네가…” 레테는 깨문 어금니 사이로 말하더니,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어!” 이윽고 소리쳤다.

여자가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관있으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레테가 소리쳤다.

“영혼이라고? 저걸 영혼이라고 생각해? 영혼을 가진 건 우리들이고, 저것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일 뿐이야.”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삐죽삐죽한 “구름”이 머리 위로 기이하게 일렁였다.

“못 알아듣겠지만…” 여자가 중얼거리며 다시 레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줄게. 저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야. 우리는 저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라고.”

“입 다물어!”

레테가 낫을 높이 들고 여자에게 달려든 뒤 내려쳤다.

하지만 그 칼날은 잔상을 가를 뿐이었다.

 

 

 

“이 장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유리를 ‘이용’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녀의 왼쪽 귀가 움찔거렸다. 뒤로 돌아보자 여자가 고원의 반대편에 생겨난 빛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 거야.”

얼굴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자세를 고치고서 사신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손을 거두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짝이는 꽃이 보였다.

“왜냐면 지금조차 나는…” 여자, 사야가 자신을 증오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당연히 너는 빼고.”

분노한 레테는 다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분노.

둘 사이에 공통된 감정은 그것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하늘이 하나였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하늘의 절반이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들이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레테의 반감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마음 속에서 들끓던 그 감정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망자들을 납치하러 왔다.

줄곧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영혼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인격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저 여자는 신이 된 듯한 전능감에 젖는다. 망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망자의 안식은 신성한 것이다.

사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레테가 담담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돌진하자 여자는 또다시 사라졌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를 기억하라. 나를 구원한 게 무엇인지 기억하라.

유리 조각이 두 사람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와중에도 사야는 가만히 레테를 관찰하고 있었다.

심장의 아픔을 기억하라. 축복을 기억하라.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명심하라.

레테의 공격이 땅에 박힌다. 저 멀리서, 사야는 레테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신념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레테…” 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레테가 멈추었다.

“그게 네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레테가 등을 돌려 사야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는 알고 있어… 기억에서 봤거든.” 사야가 말했다.

“거, 거짓말…”

“이름이 네 안에서 공명하는 느낌이 들어?”

레테가 움찔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그게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너는 그 아이들과는 달리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레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기분이 밀려 올라왔다. 레테는 애써 그 느낌을 눌러 담았다.

“난 네가 가야 할 방향을 잘못 잡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어.
기억에서 너를 보고 나서야 네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아.
너,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 아주 희귀한 사례야.”

“입 다물어.”

 
 
 

“...”

사야는 레테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조차 증오하는 거야?” 사야가 물었다.

“널 증오한다는 말은 한 적 없어.”

“말할 필요도 없었어. 뻔한걸.”

잠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레테를 지나치고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안다는 거야? 네가? 하하! 정작 자기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주제에,
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야는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 알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사야가 속삭였다.

“뭐?”

“안다고.” 사야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난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어.”

 
 
 

“... 정말이냐?” 레테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네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증거 아니야?”

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 눈 대신 달린 꽃 뒤에 뭐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저번에 말했었지.” 레테가 말을 이었다.

“널 멈추고 말 거야.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네가 이 장소의 망자들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알겠지.”

사야는 여전히,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 의무니까.” 레테가 단언했다.

그 의무가 자신을 지탱한다고, 레테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낫을 돌려 잡아,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았다.

“네 목적이 뭐든 간에, 너를 막고야 말겠어.”

 

하늘에서 유리가 빛났다. 레테가 모아온 영혼, 사야가 모아온 기억들이 부딪히지만, 결코 섞이지는 않는다.

수천 개의 잊힌 삶이, 이곳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사신은 영혼의 우물을 떠올렸다.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여전히, 그때 당시의 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는 새로운 답을 내놓았다.
옳은 일이니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 너…!”

또다시, 레테는 사야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이에 사야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 위에 놓인 유리 조각이 칼날을 받았다.

몸을 숙인 레테는 사야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야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레테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영혼의 존엄을 경시하는 행위에, 레테는 분노가 몸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너…!” 레테가 포효했다.

“내 영혼들을 빼앗아가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레테를 막으며, 사야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얻는 것…?”

사야의 손끝에 놓인 유리 조각이 반짝였다. 그녀의 꽃이 한 번 더 반짝이더니, 또다시 사야의 모습은 잔상이 되었고,
레테의 낫은 허공을 갈랐다. 멀리 떨어진 빛에서 사야가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함께 했으면 진작에 눈치챘어야 할 텐데. 난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어.”

사야의 꽃이 다시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확실하게 강조했다.

“내가 이걸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음에도, 레테는 믿기를 거부했다.

 
 
 

“네가 안다면… ‘나’를 안다면…” 사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늘에서 유리 조각 열 개가 내려와 사야의 등과 어깨를 감싸고 반짝였다.

“미안해, 지금 좀 감정적이야. 그런데 정말로…”

사야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서, 그 차가운 눈빛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레테가 소리쳤다. “이제 진짜 자기가 신이라도 됐다는 거야?”

“신이 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신처럼 행동하려 들잖아! 안그래?”

“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사야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테를 가리켰다.

 
 
 

“이미 말했을 텐데. 이 세상엔 너와 나 외에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는다.
둘 사이에 펼쳐진 땅은 잿빛이었다.

“원한다면 이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둬.” 사야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죽음은 지긋지긋해.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무언가 죽어야 한다면… 너의 목숨으로 하겠어.”

 
 
 

사야의 주변을 감싸던 유리들 또한 레테를 가리켰다.

“기억들을 내놔, 사신.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뺏겠어.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영혼을 내놓으라는 협박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어떻게든 고칠 방법을 찾을 거야.” 레테가 대답했다.

“멍청한 놈.” 사야가 저주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이제 네가 하는 말도 지긋지긋해졌어.”

레테가 웃었다.

“우연이네, 나도 네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못 듣겠거든.”

레테는 일어서 낫을 들었다.

이 차갑고 매정한 여자를…

다음 공격으로, 반드시 죽일 것이다.

 


. 진리. 목적. 의미.

허무주의.

이것들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까? 애초에 이런 멍청한 질문에 의미가 있기나 할까?

난 그런 생각에 잠겨있어.

나는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 사는 외로운 바보일 뿐이니까.

 
 
 

천국이자 지옥인 장소.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한 사후 세계. 이곳에서 나는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어.

아주 오랫동안 나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 하늘에 별이 수 놓이기 전부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내 이름을 알게 되었지. '사야'라는 이름을...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어.

내 머릿속에 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이 세계에도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끝없는 일광 아래에서 눈을 떴던 어느 날, 나는 햇빛을 받으며 구름을 올려다보고 히죽댔어.

백색의 세계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하루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어. 보통은 관찰하고 생각하느라 항상 답답하고 짜증 나는 기분만 들었는데 말이지.

그날도 항상 그랬듯이 유리 조각 '아르케아'가 내 주변을 맴돌며 기억을 보여주었어.

그 안에 비치는 것은 다양한 삶의 일면. 인생에 실감을 안겨주는 순간의 기억들이었지. 슬픈 일, 즐거운 일. 고통과 기쁨이 모두 존재해야 비로소 삶이라고 할 수 있어. 두 종류의 기억 모두 나에게 이끌리고 있었지.

왜냐면 이 새하얀 세계 아르케아에 떠도는 기억들은 자신과 닮은 영혼에게 이끌리는 법이거든. 내 영혼은 다른 영혼에 비해 더욱 강하게 '갈망'했어. 그래서 아르케아는 가능한 한 모든 걸 내게 주었지.

영혼뿐만이 아니야. 내 '정신'을 봐. 산만한데다 굶주려있지. 아르케아가, 유리 조각들이 내게 올 때면 마치 양식을 받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사방을 비추는 광휘. 분명 '신'의 빛이겠지. 온기와 힘을 지니고 만물의 위에 선 이 위대한 존재.

난 신에게 홀린 듯 이끌리고 있었어. 왜냐하면 신은 그런 상상조차 초월하는 존재일 테니까. 이 무한한 심상의 세계보다 위대한 존재...

아르케아는 마치 퍼즐과 같았어.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모든 종류의 폐허를 모아둔 공간...

도대체 여긴 왜 이럴까?
멸망 후의 세계인 걸까?
죽어버린 공간과 장소가 모이는 무덤인 걸까?
꿈일까? 천국일까? 감옥일까? 애초에 현실이긴 한 걸까?

대체 뭘까?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빠져들었어.

 

의욕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나는 아르케아를 방랑했어. 이 광활하고 황량한 세계에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건 나밖에 없었지.

사실, 너무나도 의욕이 앞서는 바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를 놓칠 뻔도 했어.

어리석고 고집불통인데다, 너무나도 싫지만,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여자와 만날 기회를 말이야...

 

오른 눈에 피어있는 꽃에 손을 가져다 댔어. 뺨이 얼얼했거든. 내 앞에 선 미련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봐. 그래. 이 여자와는 처음부터 맞질 않았어.

첫 만남부터 이랬거든:

 

 

 

미련한 소 같은 여자가 뭔가 멍청한 말을 했어.

당연히 나는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그 멍청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나는 또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내 뺨을 한 번 후려치고는 등을 돌렸어.

어리석은 야만인 같으니.

 

 

 

그 여자의 이름은 레테야. 소처럼 우둔한 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정말 소 같은 뿔이 머리에 나있거든.

레테와는 예쁜 자갈돌 길 위에서 만났어. 레테는 아름다운 유리 조각에 둘러싸여 있었지. 내가 전에 보지 못한 느낌으로 일렁이는 빛을 내고 있었어. 유리 조각들은 항상 빛을 내.

때때로는 주변의 빛을 흡수해 반짝일 때도 있지. 조각들이 모여 하늘과 공간을 수놓으면 그 광경은 마치 꿈처럼 아름다워.

하지만, 그 여자 주변에서 서성대던 유리 조각들은 무언가 달랐어. 보통 내가 유리 조각의 무리에서 느끼던 '온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 있었어. 결코 신의 온기는 아니었어.

뭐라고 할까... 세계가 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길 종용하기보다는, 세계 스스로가 유리 조각들을 향해 예를 표하는 느낌?

그 멍청한 여자는 지금도 싫어. 싫지만...
그 광경에 홀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그 기억들로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르케아에 태어난 목적이라고, 확실하다고, 레테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들은 특히나 특별했어. 그 조각들을 다루어 이어붙이면... 조각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러자 그 암소가 유리 조각들은 사실 영혼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했어. 내가 무슨 뜻이냐 묻자, 자기가 유리 조각이 아닌 형태의 영혼을 돌보던 시절 기억을 이야기해주더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서 그 여잘 멍청이라 불렀어. 그리고 뺨을 얻어맞았지.

그 여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멋대로 지어내버린 거야.

절박하고, 멍청하고, 애석한 광경이었어.

 

 

 

그래. 이 몸께선 너무 대단하셔서 다르게 생각했지. 그렇고말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었거든. 레테가 모아온 유리조각에 내 마음이 동한 것도, 내가 매일 숭배해온 세계가 오히려 레테의 유리 조각 무리에 충성을 바치는 듯한 느낌이 든 것도...

그래, 나는 믿었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서도, 바로 우리 정원사들의 힘으로 또 다른 정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겠어.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더 훌륭하고, 새롭고,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낼 거야."

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맹세했어.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야...

 

나는 오만한 걸까?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옛 세계를 뒤져보았어.

그 세계들의 한계를 비틀었어. 온갖 음료를 마시고, 불을 지르고, 하늘을 날고, 살인까지 저질렀어.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도 목격했고, 시체에 숨을 다시 불어넣거나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해봤어.

왜냐고? '경험', 그게 저 유리 조각들의 용도니까. 행동의 결과 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경험'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저것들이 신이 만들어낸 것이든 아니듯, 창조의 화신인 나에게는 내 마음대로 다룰 권리가 있었어.

... 그럼, 나는 오만한 걸까?

 
 
 

우문이야. 답은 간단해.

나는 정말로 아르케아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어.

내 세계는 처음엔 고목만큼 커다랗고, 표면이 일렁이는 유리 구체였지. 여기저기 여행하며 '경험'하기에 적당한 기억들을 골라 들어가 보고 구체에 더했어. 그러다가 레테와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

만날 때마다 마치 고양이들이 하악 대듯 서로에게 성질을 부렸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창조에 몰두했지.

이윽고 내 유리 조각들은 모여 말 그대로 산이 되었어. 지면 밑에 유리로 지은 도서관이었지. 그게 좀 더... 환상 속 이야기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난 더 갈망했어. 더, 더욱더... 왜냐하면 구체가 될 정도로 모여서도 내 유리 조각들은 세계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듯했거든.

세계를 향해 소리를 지르지도, 속삭이지도 않았어. 기껏해야 지리멸렬한 단어들을 낮게 중얼대는 정도였지. 분명 내가 조리 없이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거야. 더 모아야 해.

저 뿔 달린 여자의 유리 조각 무리와 같은 걸 만들어내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해.

 
 
 

그래서 좀 더 질서정연한 공간, 도서관을 만든 거야. 여기에는 이 기억을, 저기에는 저 기억을... 등급과 상식의 정도에 따라 기억을 분류했어. 그렇게 기억의 보관소가 탄생했어...

내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어. 그리고 실제로 결과가 따라왔지.

마침내 속삭이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기 시작했거든. 나는 도서관이 속삭이는 불가해한 언어를 들으며 잠에 빠지곤 했어.

정말로...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가능했을 거야.

 
 
 


내 '목적'이었어.

그 도서관은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어. 내가 창조해낸 그 장소는 신이 그려낸 추상화와 같았어. 게다가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니... 아니,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 그 동굴의 광경은 마법 그 자체였어.

비록 유리 조각들이 서로 섞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걷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 '도서관'은... 오로지 나의 손으로만 창조해낼 수 있었던, 오로지 나의 정신으로만 설계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어.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했어. '의미'가 있었으니까. 만족스러웠어.

 
 

아마도...

아니, 분명.

상황이 변치 않았더라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거야.

끝없이 이 새하얀 광야를 헤매며 아무 보람 없이 내 '세계'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왜냐면... 나에겐 그게 필요했으니까.

...

하늘이 둘로 갈라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나는 허름한 폐허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비타와 만났어.
 
 

 

"... 어린애인가?"

그래. 나는 반쪽짜리 금발에 루비색 눈을 가진 조그마한 인간을 '어린애'라고 부르는 부류의 사람이야.

훌쩍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 바보 레테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아니었어.

비타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다시 삼키려고 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천천히 다가갔어.

"언니는... 진짜예요?" 비타가 물었어.

"눈물 닦아. 이런 세계에서 울면 못쓰지." 내가 대답했지.

저... 저는... 그...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비타는 말을 잇지 못했어. 다시 울기 시작했거든.

나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빠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이 상황에 대해서, 이 세계를 거니는 모든 소녀들에 대해서.

 

 

 

레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거든. 레테를 만나고 나서도, 내게 있어 그 여자는 최악의 경우엔 적, 최선의 경우에조차 갈피를 못 잡는 우둔한 멍청이 소대가리일 뿐이었지.

분명 레테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나와 레테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하지만 내 앞에 있던 건 그저 조그만... 어린애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고칠 의무를 짊어진 일꾼이... 어린애라고?

... 정말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 비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어. 내가 두른 기다란 망토가 비타의 귀에 쓸리자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어.

"닦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비타는 잠시 머뭇거린 뒤 망토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닦고 코를 팽하고 풀었어.

…그 그림자 진 흙투성이 폐허에서 나는 적당한 기억을 찾아 눈을 굴렸어. 되도록이면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억으로.

딱 맞는 게 하나 있었어. 그걸 우리 쪽으로 불러냈어.

"일어나." 내 말에 비타는 벌벌 떨며 일어났어. 나는 우리 둘 사이로 유리 조각을 치켜올렸어.

"손잡아." 그렇게 지시하자 비타는 또 시킨 대로 했어. 그렇게 우리는 유리 속 기억으로 떠났어.

 

 

 

그 기억에서,

... 우리의 기억에서,

따스하고 고즈넉한 여관의 식당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어. 거기서 비타가 자기 이름을 알려줬지.

그때는 나도 내 이름을 알아낸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나는 깜짝 놀랐어.

"뭐 먹고 싶어?" 내가 물었어.

"뭐 하러요? 이건 기억일 뿐이잖아요." 비타가 대답했지.

비타의 대답에 나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어. 조금 눈썹이 움찔댔어. 그래도 또다시 물었지.

"이 기억의 주인들은 뭘 먹었지?"

비타는 정확하게 대답했어. 기억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질문했어.

"그럼, 네가 먹고 싶은 건 뭐야?"

 

 

 

"다른 걸 시키면 어떻게 되는데요?"

"직접 해봐. 그러면 알겠지."

"기억이 망가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이 기억엔 다른 요리를 시킨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무섭니?"

"아뇨, 그냥..."

"그냥 뭐?"

"... 그냥 아직은 이 기억이 끝나는 게 싫어서요."

 

 

 

...

과연 그 말대로, 우린 기억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어.

나는 그날 비타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그 애가 알고 있는 걸 여러 가지 들었어.

물론, 그 꼬마 녀석도 나에게 질문했지. 아주, 아주 많이.

흐음.

기억이 끝난 후 우리는...

폐허를 뒤로하고 떠나갔어.

둘이서, 함께.
 

 
 

내게 남은 이름은 '사야'뿐이야. 그리고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우리는 전에 있던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사야는 죽었어. 그리고 사야는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어.

그 사실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어. 어렴풋이 여긴 어떤 형태의 사후세계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죽은 사람 모두가 이곳에 온 건 아니야. 아르케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끝을 향해 걸어가. 우린 모두 다른 소원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그 소원 때문에 이곳으로 끌려온 것은 아니야. 보통 죽어가는 사람은 살고 싶다 염원하는 법이지만, 그런 소원을 지닌 사람은 여기엔 거의 없어.

소원 없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어. 예를 들어 비타의 마음속엔 그 어떤 소원도 들어있지 않아. '코우'의 마음속도 그래.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소원 때문이 아니야.
운명도 아니고.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신'때문이야. '신'의 기분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깨어난 거야.

그 신은 웃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아.

그 신에겐 얼굴조차 없을 지도 모르니까.

 
 
 

비타와 함께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 조수... 아니, '동료'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가 되었지.

힘든 시간이었어. 비타는 걱정이 많아서 툭하면 울곤 했거든

잘 때엔 나한테 꼭 붙어서 자고,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했어.

재채기 소리는 엄청나게 커. 보기보다 몸무게는 나가는 편이고. 아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어.

힘든 시간이었어. 하지만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나는 후회해.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어.

 
 

"사야 언니, 저게 뭐예요...?"

종말의 순간에 비타가 내게 물었어.
대지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생명이 하늘로 빨려올라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어.

아르케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그 생명력이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어느곳으로 모이는 모습을.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사건의 결과, 끔찍한 미래.
그런 미래가 도래할 것이란 걸 우리 둘 다 느낄 수 있었어.

나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은 비타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특이현상이야. 이 세계에선 흔히 일어나는 특이현상."

 
 
 

그 후로 나는 더 필사적으로 내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했어. 빛, 아르케아의 '종말'과 함께 대지가 무너지기 시작했거든.

처음엔 조금씩... 그러다가 더욱 격렬하게... 대지가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아래의 '무無'를 향해 떨어졌어.

영원히 세계의 끝자락을 할퀴는 심연의 공간...

공허를 향해.

...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보관소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뭔가 더 필요했어. '저 너머'의 무언가가.

삶을 영위할 제대로 된, 완벽한 장소가 필요했어.

그런 장소를 만드는 건 더이상 나라고는 할 수 없겠지.

 
 
 

... 언제부터 나는 다시 '염원'하기 시작한 걸까.

가끔, 하루치 여행을 끝내고 나서, 그 꼬마 녀석이 나조차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어.

질문, 질문, 질문...
하지만 이제 질문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불편한 침묵 속에서는, 마음속으로 빈 소원조차 동굴에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들리는 법이야.

하지만 종말 전에도 나는 염원하고 있었어. 나 스스로가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을…

 
 
 

...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어. 오로지 스스로에게 되뇌일 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라붙은 바다와 기울어진 언덕과 무너져내린 산처럼,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죽어갈 거야.

마지막에는, '허무'만이 남겠지. 공허하고, 허세로 가득 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 화자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

타인의 기회조차 뺏어버린 이야기. 집착의 끝에 소중한 사람을 익사시켜버린 이야기가...

 
 
 

알려줘. 나는 오만한 걸까?

답은 '그렇다'야.

난 나 자신을 믿어.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있을 발견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리라는 의지를, 무엇이든 '한다'라는 의미를.

미래를 믿어.

그리고, 미래를 염원해.

어디로 가든 나를 따라오며 똑같은 발자국을 밟는 소녀와 함께 이 대지를 걸으며…

나는 내 소원이 울려 퍼지길 원하고 있어. 비록 도저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마지막 저항, 이 세계가 머리를 조아리도록 만든 그 유리 조각의 무리를 믿어.

신이여, 레테, 그리고 비타...

나를 천국에서 추방해 지옥으로 떨어뜨려주오.

... 뿔쟁이 여자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빼앗아올 테니.
 
 
"비가 오네요..."
 

 

비타가 유리 도서관의 구석에 있던 나를 찾아와 말했어.
밝으면서도 어두운 동굴 안. 나는 앉은 채 한 번 비타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렸어.

비...

아르케아에서 지낸 몇 년간, 단 한 번도 비를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지평선 너머로 비와 눈, 천둥과 번개를 보는 건 별난 일이 아니게 되었지.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었어.

나는 일어서며 말했어.
"비타... 가자. 따라올 때엔 뒤에 숨으면서 따라와."

"가자니... 어디로요?"

"레테한테." 나는 주저 없이 말했어. "그 여자를 죽일 거야."

나는 말없이 비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산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출구로 향했어.
비타는 머뭇거리다가, 시킨 대로 날 따라왔지.

"... 죽인… 뭐라고요?! 안 돼요!"

비타가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의 뒤를 종종 따라오며 소리쳤어.

비타는 항의를 멈추지 않았어.

망토를 붙잡혔어.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뿌리쳤어.

돌을 집어 들어 내 등으로 던졌어.
그래도 난 멈추지 않았어.

"대체 왜요?!" 비타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어.
 
 

끝임없이 쏟아지는 비. 나는 등을 돌려 비타를 마주봤어.
비타는 반짝이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어.

"비타...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내가 말했어.
 

 
"알아요..." 비타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그때 깨달았어. 아, 비타도 알고 있구나.

"그래서... 그래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에서 무언가를 느꼈어.
우리가 만들어낸 이 도서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나는 설명했어.

"모두를... 구하려면,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그리고 빼앗아 이용해야 해.

그게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레테는 날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이제 그 여자를 설득할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아."

"레테의 신념이...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이 설득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 여자의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리고 그 불은 나를 향해 솟구칠 거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그렇다고 설득할 시도조차 안 하겠다고요?" 비타가 나를 책망했어. 내 입이 비릿한 미소로 일그러졌어.

"말을 해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비타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어.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그쳤어.

나는 가볍게 말했지.
"그래. 한 번 이야기해볼 테니 안전한 거리에서 잘 보고 있어."

나는 유리 조각을 잔뜩 챙겨 레테가 있는 곳으로 향했어.
그곳에 가까워지자 레테의 유리 조각과 내 유리 조각들이 거의 닿을 뻔했지만,

두 무리가 결코 섞이지는 않았어.

절벽의 끝자락. 아주 밝은 곳이야. 유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치고 있어.

그 밑에 서있는 레테는 그림자에 감싸여 있어.
절벽 너머에서는 공허가 입을 벌리고 있어.

"야, 사신." 여자를 불렀어. "하찮은 다툼은 그만두자.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달라고?!" 레테가 쏘아붙였어. "이런 짓을 해놓고 할 말이야?!"

아.
핵을 부숴서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게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나를 향한 평가가 너무 박한걸.

나는 등 뒤를 보고 비타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레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

그 후의 '대화'는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어. 참담하게 말이야.

귀가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레테의 칼날이 번쩍거리고...

오른 눈에 핀 꽃 덕분에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나는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동하며 레테의 공격을 피했어.

자제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레테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어. 정말. 정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나는 레테를 향해 반드시 유리 조각을 빼앗겠다고 맹세했어.
레테는 나를 향해 아르케아의 조각난 핵을 고치겠다고 맹세했어.

역겹기 짝이 없어...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유리에 칼날이 부딪히자 물방울이 촤악 튀었어.

나와 레테가 자아내는 격렬하고 악랄한 춤.

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낫을 휘두르는 레테.

그 얼굴을 향해 빛나는 유리 조각을 날리는 나.

머릿속이 울려. 역겨워서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나는 실패했어.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 싸움은 두 실력자의 장렬하고 근엄한 혈투 같은 게 아니야.

레테와 나는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이기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내가 지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야.
알 수 있어.

우리는 더 나은 결말이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두 여자일 뿐이야.

그런 결말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인생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도 난 발버둥 쳐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메스꺼워.

레테가 한 번 물러섰다가, 초인적인 힘으로 낫을 끌고 다시 나에게 달려와,

그걸 보고 내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레테의 가슴을 향해 내려친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손가락이 하나 나타났어. 그리고 싸움이 멈췄어.

"?!"

"뭐...?!"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 칼날이 부딪히려던 곳에 사뿐히 내려앉았어.

그 순간, 온몸에 격통이 엄습했어. 쓰러질 것만 같아.

내 유리 조각은 부서지고, 레테는 낫을 놓쳤어.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아갔어.

마치 거대한 막대가 두드리는 북처럼 대지 그 자체가 울리고 있어.

우리는 공중에 멈춰 섰다가...

대기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다시 우리를 빨아들이듯 땅으로 내동댕이쳤어.

땅에 부딪히는 순간 레테의 낫이 내 옆구리를 깊게 베어내고 내 뒤로 미끄러졌어.

레테의 왼팔에는 내 유리 조각이 몇 개 박혔어.

쓰러짐과 동시에,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로 무릎을 꿇렸어.

몸이 전부 찢겨나갈 것 같은 고통이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렸어. 숙일까보냐.

길고 창백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지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우리 사이에 서 있었어.

여자는 미소가 걸린 얼굴로
나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 레테를 보았어.

"어휴, 너희 둘, 적당히 하렴." 여자가 입을 열었어.

"너무 거칠게 놀다가는 소중한 걸 부숴버릴지도 모르잖니?"

나는 힘을 쥐어짜내 일어서려고 했지만 쉽게 일어설 수가 없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야.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어.
저 말투...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자는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
 


"자, 그럼... 안녕, 이 고집불통들아." 여자가 말했어.

"만나서 안 반가워."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서툴게 만들어진 세계에 현현된 육체들은... 예상 외로 튼튼했다.
세계의 창조자가 지닌 생에의 의지가 그렇게 표현된 것일까?

아무튼, 몸이 유리 실이 되어 풀어지는 것.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은...

다른 세계로 보내기 전 '마야'의 자아가 유지되도록 분해했을 뿐,
그녀의 육체를 파괴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육신이 유리로 이루어진 소녀는, 아르케아와 바깥 세계의 경계에 닿는 순간 파괴된다고 믿었겠지.

과연 정말로 그럴까?

신이 빈 소원이란 그리 무른 것이 아니다.

 

 

...어디, '멋진 곳'으로 떠나버린 그 소녀를 다시 만나러 가보자.

실이 되어 풀어져 가면서도, 마야의 의식은 뚜렷했다.

 

 

'멋진 곳'...
논리와 이성으로 만들어진 총천연색의 세계.
마야가 호박색 강이 흐르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내렸다.

유리로 된 실이 나선을 이루며 하늘에 뚫린 관문을 통해 고요한 장소로 흘러 내려왔다.
마야가 부드럽게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 뒤로 문이 쾅하고 닫혔다.
돌바닥을 덮은 주홍색 카펫 위로 흘러내린 유리 실이 다시 마야의 육신을 이루었다.
딱딱한 바닥에 불편한 자세로 뉘인, 두 빛깔을 지닌 소녀.
그녀는 비극으로부터 탄생했다.

그 뺨을 또, 눈물이 적시고 있었다. 또...

 

 

모르는 천장이다. 숨이 가빠졌다.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대, 대체... 누구였지...?"

마야가 얕은 숨으로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방인의 모습이 눈 앞과 뇌리를 스쳤다.

"세상에 무슨... 그런 정신 나간 여자가..."

...

그 '정신 나간 여자'에게 구원받아놓고서, 소녀는 은혜를 몰랐다.
그런 배은망덕한 생각조차 온전히 마야 본인의 생각이니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아르케아가 또다시 마야가 모르는 사이에 그 생각을 멋대로 끄집어내 기록해놓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야가 몸을 일으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아까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마야는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 곳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가는 길이 아닌,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문이.

...잠시 생각한 후, 마야는 걸음을 내딛어 그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마야를 자극할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넓디 넓은 아트리움. 머리 위를 덮은 천장은 마치 거인의 해골처럼 융기되어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그 천장을 근엄하게 받치고 있었다.
마야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야는 소리내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고, 하늘에서 내려온 그 여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런 말을 중얼대며 마야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완벽한 세계에는 먼지 한 톨조차 없었다. 질서정연함이 모든 곳에 배어있었다.

마야의 시선 안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이 반드시 제자리에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물건들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지 않고, 조심스럽게 놓여있었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신의 마음씨와 사랑이 표현된 공간이었다.

동상과 고서들...
줄지어 놓인 식물들, 케이스에 담긴 식물들...
구체를 비롯한 다양한 모양을 한 지구본들, 다른 세계의 지도들...
도구와 장치들, 화면들...
분수와 거울들...

수많은 세계에서 온 것이 분명한 수많은 물건들이 공간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트리움에 울리는 마야의 발소리. 그 위로 목소리가 실렸다.

"여긴... 어디 저택인가...? 누구 없어요...?"

확인해보는 듯 내뱉은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벽의 반절은 초상화와 다른 세계를 묘사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모든 방과 복도가 마야가 난생 처음 보는 장식품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주의를 가장 끄는 것은 단연코 그림들이었다.

새하얀 모래 사막을 그린 한 풍경화 앞에서 마야는 멈추어 섰다.

그 풍경을 본 적 있기 때문에 멈추어 선 것이 아니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마야는 손을 뻗어 그림을 만졌다.

 

손가락 끝이 닿자, 마치 물결이 요동치듯 그림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 너머로 손가락이 통과하지는 못했다.

...야만인처럼 내던진 돌멩이도 그림을 뚫지는 못했다.

그 관문은 오로지 이 저택의 주인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마야는 얼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텅 빈 복도. 걸어가다 보면 이따금씩 보이는 흐릿한 유령들이 마야의 주의를 끌었다.

저 멀리서 가끔씩 들려오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어느 방향에서 난 소리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마야는 계속해서 저택을 방황했다.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마구잡이로 쓸어온 잡동사니가 아닌, '엄선된' 수집품들이었다.
...곧 마야는 깨끗한 일기장을 발견했고, 또 얼마 안 있어 잉크가 무한히 흘러나오는 깃털 펜을 발견했다.

'정신 나간 여자'가 세운 이 저택에 뚫린 수많은 창문으로부터 쏟아져내리는 검고 노란 빛을 쐬며,
마야는 예쁘게 생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마야의 일지, 1일. //

//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죽은 걸까?
아니, 분명 한 번 죽었지만, 왜인지 모를 이유로 다시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아르케아라고 불리는 곳에서 깨어났다. 일지를 쓰고 있는 이 장소는 아르케아가 아니다.
비록 아르케아가 매정하고 이상한 세계일지라도,
그 여자가 만든 이 세계보다는 더욱 큰 잠재력을 지닌 장소일거라 생각한다.

잠재력이란 희망의 씨앗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씨앗은 싹을 틔울 것이다. //

 

// 내 이름은 마야인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

마야가 펜을 움직였다.

// 이 일지를 찾을 지도 모르는 그대를 위해, 내가 아는 것을 적어놓으려고 한다. //
 
...마야는 이제 스스로 자기 생각을 남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성장했구나.

...그렇게 하도록 두자.

마야는 아르케아에 도착하고 나서 일어난 일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녀가 잃은 친구들에 대해서.

 

 

한 기억의 편린.
조그마한 종이책. 구시대적이지만, 마야는 그 감촉을 좋아했다. 또한 열 두살이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에 목을 매는 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많은 것에 자부심을 지닌 마야였으나 종이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나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마야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 물었다.

“어디서 맨날 그런걸 갖고 오냐?”

작은 가게, 늙은 여인, 낡은 물건... 마야는 그것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동시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야는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저택을 탐험했다.

 

 

며칠이 지나고 일지가 몇 장 더 채워졌다. 처음 몇 장은, 그녀의 삶에 대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 삶, 두 번째 삶, 그리고 납치.
하지만 최근에는 이 신의 저택에서 찾아낸 불가사의에 대한 내용을 더 쓰게 되었다.

// 마야의 일지, 8일. //

// 정말로 짜증나는 일이지만 나는 마법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니, 마법이든, 기적이든, 권능이든, 심지어는 '신'들의 장난이든, 좋을 대로 부르라.

멋대로 바뀌는 통로, 흐릿하게 보이는 유령, 공중에 떠 있는 조명,
점점 커지고 있는 듯 한 기분까지 드는 이 저택의 말도 안되는 크기까지.

이게 마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 —나는 사후 세계 또한 믿지 않는다.

나는 확실하게 죽었다. 분명히 그건 죽음의 감각이었다.
그 모든 게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일어난 일인 것 또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 사실들과, 내 죽음, 그리고

거울을 보았을 때에 비친 나의 새로운 얼굴과 눈동자.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주 단순했다. 내 모습은 이전과 매우 다르다.
내가 이 일지에 써놓은 일들.
즉, 내 삶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 날 이 곳에 가둔 그 여자는 스스로 자길 신이라고 했지만 그게 사실 일 리가 없다.
그럼 그 여자는 뒤틀린 천사 같은 걸까? 아니면 저승 사자? 그럴 리가, 바보 같은 추측이다.

여긴 그 여자의 집인 걸까? 그럼 그림이 이렇게 많은데 왜 자기 얼굴을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 한 장 없는 걸까?

그리고, 이 곳이 만약 사후 세계라면 //

마야의 펜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난 작은 원형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이 곳이 '사후' 세계라면...
내가 혼자서 죽은 게 아니라면...

여기엔 정말로 나 혼자일까?
나는 혼자서 죽지 않았어.
그리고 내 '목소리'는 별 너머까지 닿을 수 있어.
그러니, 어쩌면...

 

 

소녀는 한 때 군인이자 초능력자였다.
그 정신은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자신과 함께 죽어버린 수많은 사람들과.

마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을 집중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보냈다.

머뭇거리는 듯이, 단 한마디를.

"거기 누구 있나요?"

...

 

 

그리고, 대답이 들려왔다.

한 소녀의 대답이, 부드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있...어요... 누구시죠...?"
 
 
 
"내 목소리가 들려?!"

마야는 매우 큰 '목소리'를 하늘로 쏘아보냈다. 듣는 쪽이 움찔할 정도로.

분명히 움찔한 후인 상대방이 곧 대답했다.

"마, 마, 말도 안돼... 이, 이거 환청 아니죠? 세상에...!"

"아니야...! 환청 아니야...!" 마야가 반복해 말했다.

"아니야..." 말했다. 자신의 성대로. 자신의 심장으로.

"고, 고마... 흑, 다, 다행... 너무 다흐흑..."

...또다시, 마야가 울기 시작했다.

"우... 울어요?"

"..."

마야는 훌쩍거림으로 대답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건너편의 목소리가 물었다.

"진짜... 사람 맞죠. 그쵸?"

"맞아." 마야가 대답했다. "...이름이 뭐야?"

"아... 이름이요?"

"그래... 이름과 계급... 아, 관등성명?" 마야가 올바른 표현으로 다시 물었다.

"관등... 네?"

건너편의 소녀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마야에게 전해져왔다.
마야의 심장을 서늘한 감각이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 아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나와 같은 초능력자면서, 이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걸 깨달은 마야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바보처럼, 마야는 다시 물었다.

 

 

"제, 제국... 제국은 기억해?" 마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 제국... 제국은 기억 안에서... 몇 개 본 듯한...?"

"NMPGM은...? 기억 나...?"

"무슨 약자인가요? 미안해요... 모르겠어요."

"괜찮, 괜찮...아." 마야가 거짓말을 뱉었다. "진짜로, 괜찮아."

마야의 머릿속이 요동쳤다.
와, 우리 둘 다 초능력자야. 이렇게 정신으로 대화로 할 수 있어.
와, 하하하. 그런데 쟨 아무것도 기억 못하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인...

 

 

"잠깐! 진정... 진정해요! 아르케아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원래... 기, 기, 기억이 없어요!"

건너편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보, 보통은요. 기억을 조금 갖고 있는 사람은... 한 명 본 적 있어요."

"사람을... 봤다고...?"

"지금 아르케아에 계세요...? 저희가 찾아뵐 수 있을까요?"

"난 지금—"

마야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생각이 멎었다.
얼굴에 드리운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그 순간,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얼굴 없는 목소리에게 믿음을 주고 말았던 순간의 그 기억이.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아니, 믿어서는 안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야는,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내 이름은 마야..."

마야가 다시 허공으로 목소리를 쏘아보냈다. 마치 혀를 바늘로 찔리는 듯이 괴로웠다.

"너한텐... 이름이 있니...?"

"함부로... 이름을 알려주면 안된대요..." 상대방이 망설이며 대답했다.

 

 

마야는 그 말에 대답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그렇지...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돼."

"...그래도, 믿고 싶어요."

"...응?"

"마야 씨를 믿고 싶어요... 이야기를 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잖아요."

"..."

"저기... 듣고 계세요?"

"응." 마야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그건... 다행이네."

 

 

"어, 음, 어..."

건너편의 목소리가 버벅거렸다. 마야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리고 등을 곧게 폈다.

"아르케아에 있다고 했지? 지낼만 해?" 마야가 물었다.

"어, 네! 마야 씨는요...? 괜찮으세요?"

"아, 음... 아니, 안 괜찮아."

마야의 얼굴엔 여전히 비릿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저 너머의 소녀는 마야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정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마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아르케아에서 나와버린 마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마야 또한 자신이 죽였을 터인 저 소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무언가에 저항하듯, 소녀는 마야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따금씩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마야의 '죄책감'을 가만히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마야의 감정과 생각이 조금씩, 또 조금씩, 따뜻해질 때까지...
소녀는, 마야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용한 신의 저택...

그 한 가운데에서, 마야는 일지를 펼치고, 깃털 펜을 다시 들었다.
 
 
 
 
// 마야의 일지, 42일. //

//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저택과 아르케아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내 목소리는 과거를 거슬러 아르케아에 닿고 있으며, 시간 흐름의 차이 또한 불규칙적이다.
어떨 때엔 이 곳의 1시간이 저 곳에선 1일이며, 또 어떨 때엔 이 곳에서의 1분이 저 곳에선 1시간이다.
비타는 아르케아가 무너지며 형형색색으로 번쩍였던 사건이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간의 차이에 제약 받지 않고 '목소리'로 대화할 수 있다.

시간 팽창이라는 원리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

 

 

//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비타 말로는 이제서야 아르케아에 날씨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는 점이다.
비타의 시간이 내가 그 여자에게 납치당했던 시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럼 이제 비타가 미래에서 나에게 목소리를 보내게 되는 걸까...? 앞으로 아르케아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그 여자는 나를 이 곳으로 보내기 전에 자신의 야망을 이야기했다.
아르케아는 망가져 있으니, 자신의 손으로 고치겠다는 야망을.
날씨가 있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걸까?

쉽게 신뢰해서는 안되는 여자다. //

 

 

// 그 여자는 아르케아에 오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집착과 망상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나저나, 내 문체, 혹시 너무 딱딱하고 복잡한 걸까?
어렸을 때는... 살아있을 때는, 가끔 내가 허세를 너무 부리는 것 같다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반대로 문체가 너무 건조해져서 이 일지에 불이 붙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

복도를 걸어가던 마야에게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건너왔다.

"마야 씨! 오늘 무슨 일이 있었게요?"

"오늘은 네가 탐험 리더 했어?"

"오늘은 제가... 와! 어떻게 맞췄어요?"

그 목소리를 듣고, 마야는 미소를 지으며 펜과 일지를 집어넣었다.

 

 

둘은 주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야는 자신이 납치당해온 저택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반쪽은 아르케아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은...

"마야 씨, 말씀하셨던 유령이라는 건... 그... 진짜 '유령'인가요?"

"음, 그건 아닌 것 같고... 흐릿한 형체?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사람 형체야."

"아! 신기루군요!"

"응."

 

 

그 전날에는...

"마야 씨!!"

"응."

"호수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또 어느 날은...

"마야 씨...!"

"응."

"오늘은...! 딱히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럼 하자. 이야기."

 

 

또 어느 날은...

"마야 씨! 언니 진짜 너무 짜증나요!"

"그렇구나... 그럼 왜 같이 지내?"

"어으...! 음... 혼자... 혼자 있는게... 싫어서요. 아, 그, 그것 뿐만은 아니에요! 놀리지 마요!"

"놀린 거 아닌데? 귀엽네."

"아아아으! 좀..."

 

 

"마야 씨!"

"그래."
            "마야 씨, 있어요?"

            "마야 씨~!!"
                               "무슨 일이야?"

                               "있죠, 있죠, 마야 씨!"

                  "마야 씨, 오늘 기분은 어때요?"

                  "오늘 재밌는 걸 찾았는데요..."

...

 

 

익숙한 일상이 떠올랐다.
마야는 웃으면서도, 마음속에서 다시 기어올라오는 공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정이란 그저 감정일 뿐. 감정만으로는 현실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마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마야의 팔을 가로지르고 있던 균열이 더 벌어졌다.
그녀의 걸음과 함께 유리가루가 흩날렸다.
 
 
 
// 마야의 일지, 108일. //

// 놀랍게도 내 이름은 아직 기억할 수 있다. 매번 일지 서두에 써넣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팔이 하나 없어져서 글을 쓰기 좀 힘들어졌다.

아마 나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써넣은 일지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주변의 물건으로 여러 실험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내 몸이 왜 무너져가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유령'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들의 몸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이건 아마 그 여자의 짓이 아닌, 나의 특성일 것이다.
그 여자는 날 소중히 여기는 듯 하니, 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 유리 가루가 되어버린 날 보면 굉장히 당황할 것이다.

유리 가루라... 흠...

비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몸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으면서도

너의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단다. //

 

 

 

마야의 이야기는 곧 끝을 맺는다.
무너져가는 기억과 몸.
이렇게 비극적인 결과는 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이 모든게 자신의 특성일 것이라는 마야의 말은 옳았다.
마야는 아르케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진 유리와 기억의 덩어리일 뿐이었으니까.

존재했던 어떤 사람의 파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 너머에서는,
다른 파편들이 어둠 속을 헤메고 있었다.
세계의 밑바닥, 칠흑같은 공간...
비타라는 이름의 소녀가 무언가를 손에 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친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얼마 전 비타가 몸조심하라고 했으 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았다는 대답만을 받았다.
하지만... 분명히 마야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한다면...
마야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한다면...
절망적인 현실이 비타를 덮쳤다.

 

 

아니. 아니다.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르케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르케아에게 그 염원이 닿았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염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깊이 연결된 정신을 통해, 하나였던 두 마음이 또다시 만나리라.

생전에 지녔던 힘과, 조용한 신의 동정심으로... 이루어내리라.

그리고, 마야여, 비타여. 여기 또 다른 신이 그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그대들의 이야기를 읊겠노라.

 

입에 한 번 담은 염원으로
세계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공간으로 소녀가 발을 들였다.
심장과 머리에 동시에 울리는
별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그 부름에 이끌려 소녀가 영혼을 잃었다.
본 적 없는 공간을 그 영혼이 헤메었다.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자, 비타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왔다.

 
 

백색의 불꽃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짓눌려 으스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비타는 버텼다.

두 세계 사이에 이는 격랑이 비타의 정신을 흔들었다.

 
 

이윽고...

거세게 몰아치던 혼돈이 사그라들었다.
비타의 영체가 처음 보는 '어둠' 한가운데에 현현했다.
마치 우주와 같은 어두움. 하지만 어두운 건 익숙했다.
다른 세계들이 보였다. 새로이 탄생한 백색의 별들이 보였다.
저 너머에서 일렁이는 광활한 공간이 보였다.
머나먼 세계의, 완벽한 빛이 보였다. 그 앞에는...

팔이 하나만 남은 소녀가...
비타와 비슷하게 두 빛깔의 눈과 머리칼을 한 소녀가 있었다.

부서져버린 마야의 형체가, 저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비타가 힘을 주어 불렀다. "마야 씨!"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언젠가 본 적 있는 미지의 색채가 자신의 몸을 감쌌다.
몸에 한기가 돌았다.

비타는 자신의 투명한 손을 뻗었다.

색채가 손가락을 감으며, 팔과 목을 감싸고, 비타를 앞으로 당겼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비타는 이를 꽉 깨물고, 색채와 함께 자신의 몸을 앞으로 당겼다.

마야가 그에 응하듯이 비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소녀 사이에 빛과 어둠이 요동치며, 총천연색의 빛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두 손이 만났다. 마치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비타의 손끝으로 자신과 마야의 맥박이 느껴졌다.
별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당겨 조용히 껴안았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려 한다.

이는 비타도 잘 알고있었다.

"참 웃기네..." 마야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오니까, 잊었던 게 모두 기억났어."

"마야 씨." 비타가 대답했다. "그... 그 여가자 한 짓이에요?" 마야의 조각난 몸을 보며 물었다.

마야는 고개를 저였다.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된 것 뿐이야... 네 슬픈 기억이 또 한 줄 더해지겠네. 미안해..."

"..."

"이제 어떡할 거야?"

 
 

"아직도 자기 자신 걱정은 안하시는군요."

"뭐 그렇지... 그래서, 어떡할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비타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마야와 맞추었다.

"왜 마야 씨를 찾아 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마야가 잠시 비타의 품에서 떨어진 뒤,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 일지를 꺼내들었다.

"이걸 갖고 싶었니?"

마야가 슬픔이 섞인 농담조로 말했다.

 
 

"아니에요." 비타가 건조하게 부정했다.

"그랬음 좋았을텐데." 마야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전... 마야 씨를 구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비타가 말했다. 마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야 씨까지 잃고 싶지 않아요."

"..."

 
 

"그럼 그래야지. 날 구해줄래?"

"무슨... 뜻이에요?"

"예전에 얘기한 적 있잖아... 비타."

마야의 말에 비타의 표정이 구겨졌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기억하니?"

"기억하냐니... 재미없는 농담이에요."

"그래... 재미없지..."

비타와 마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이 기억들을 네게 전할 수 있다면... 나는 네 안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야 씨는 그냥... 그대로 조각나 버리는 거에요?"

숨소리 섞인 조그마한 목소리로 비타가 물었다.

 
 

천천히, 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비타..."

"...아뇨, 알겠어요."

비타가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곱씹었다.

"알겠어요."

 
 

비타가 손을 일지 위에 올렸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일지를 들고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천천히, 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 씨..." 비타가 말했다. "돌아가요. 함께."

그렇게 말하자...

기억들이 두 소녀를 감싸며 소용돌이쳤다.

 
 

마야가 비타에게 말했다.
"울지 마. 눈물 보이는 거 아니야."

비타가 마야에게 말했다.
"매번 그렇게 군인 같은 소리... 싫어요."

"마야가 말했다.
"...하핫, 있지. 사실은 나도 싫어."

비타가 말했다.
"쭉 싫었어요..."

두 소녀의 말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게 기억나."

"이제... 우는 건 질렸어."

"지긋지긋해..."

한 감정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괜찮아.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마야... 이제 괜찮을 거에요.

비타... 그래. 너와 하나라면.

 
 

머나먼 곳의 별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른 별이, 또 다른 별이 반짝였다.

마야의 몸에서 수정으로 된 꽃이 만개하며, 몸을 가로지르는 균열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두 소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야의 기억과 비타의 기억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이상한 세계, 기묘한 공포, 신들의 변덕...

그 모든 것이 마야와 비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이야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우주를 거니는 인류의 세계에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소녀.

국가를 위해 길러져, 수많은 정신 통로를 거느리게 된 소녀.

하지만, 무지했던 소녀는 믿어서는 안될 목소리를 믿고 열어서는 안될 통로를 열어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 또 죽음. 백색의 세계의 경계에 그녀의 영혼이 닿았을 때. 망가져버린 그 세계가 또다시 실수를 저질렀다.

잘못 만들어진 마음이 저질러버린 실수.
아르케아는 비타의 기억을 끄집어내었으나, 평소처럼 그것을 흐트려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은 기억들은 감정과 형태를 갖고,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리고 아르케아는 그 기억에게 유리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형태의 피난처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비타의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몸이, 그녀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깨어났다.
그 몸은 자신에게 깃든 기억이 고통받던 것과 같은 이유로, 고통받았다.

마야의 기억과...
비타의 기억은 하나이다.

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색채가 일렁이며 반짝였다.

마야의 몸에서 더 많은 꽃이 피어났다.

두 사람을 감싼 공간이 재빠르게 소용돌이쳤다.

 
 

마야와 비타는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눈을 떴다.
비타는 반대쪽 손을 뻗어 마야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찢어지며 붕괴했다.

비타의 영혼이 다시 유리에 세계로 끌려감과 동시에 압도적인 빛과 소리의 파도가 몰아쳤다.

비타는 눈을 찡그린 채 자신의 반쪽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강하게 안았다.

그 눈에는 마야의 미소가 비치고 있었다.
그들의 궤도를 따라 마야의 몸이 조각나고 부서지며 반짝이는 유리 흔적을 그렸다.

비타와 마야가 지나치는 별들이 비명을 질렀다. 우주가 찢어지던 소리가 갑작스레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비타는 그저 계속 안고 있었다. 더이상 안을 것이 남지 않을 때 까지.

저 세계의 저택에는, 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바로 여기, 아르케아에서 비타가 눈을 뜨자.
그 마음과 정신에는 옛 기억과 함께 새로운 기억이 깃들어있었다.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다. 그 대지에 비타가 두 발을 딛고 단단히 섰다.

한 손으로 일지를 들었다.

"..."

 

일지를 들고 중간을 펼쳐, 끝없는 백지가 이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적힌 글귀를 읽었다.

// 그 날, 내가 불렀을 때 대답해줘서 고마웠어. //

비타가 가만히 일지를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숨이 가빠졌다.

천천히...

비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타... 그게 뭐니?"

그 목소리에 비타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일지를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기며, 천천히 대답을 생각했다.

일지에 무엇이 적혀있는 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페이지를 넘기며, '자기 자신'이 쓴 글을 훑어보았다.

...생각을 마쳤다. 일지를 닫았다.

몸을 돌려, 친구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대는 신을 믿는가?

거인의 몸 깊숙한 곳,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깊게 고인 붉은 웅덩이 위로 소녀가 발을 딛었다.
어둠이 모든 색을 덧칠한 공간.
천장을 향해 거꾸로 솟아오르는 액체가 소녀의 뺨을 적셨다.
소녀는 뺨을 어루만지며 표정을 구겼다.

어두운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괴물이 저질러놓은 난장판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 그보다는 괴물 그 자체의 모습을 눈에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안 봐도 어떤 형상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세 번이나 본 적 있으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소녀는 신의 손을 지닌 '조형자'였다. 짐승을 제압하는 일 따위 식은 죽 먹기였다.

소녀는 혀를 굴려 목소리를 빚어 자신의 제자가 있는 방향으로 날려 보내 물었다.[각주:1]




"준비 됐어?"

 
 
 
 

곧 대답이 귀에 닿았다. "바보야? 당연하지."
"조용히 해." 소녀가 속삭이고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기공(氣空) 랜던을 켜,
그 빛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와 회랑을 비추었다.

고대의 천사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보였다.
신을 그린 그림들이 보였다.
거대한 해골, 레폰의 신성한 척추와 갈비뼈를 그린 그림이 보였다.
그리고 사냥감을 찾아온 거대한 짐승이 보였다.
반대쪽 벽에 웅크려 어슬렁대며 쭉 뻗은 촉수 끝에 달린 외눈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몸은 여덟 개의 깃털 달린 날개 뒤에 숨어있었다. 그 괴물은 공포의 권능이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소녀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움직였다.

짐승의 눈이 파랗게 빛을 내며 열을 뿜었다. 그러자 소녀의 옆과 뒤에 강렬한 힘의 돌풍이 몰아쳤다.
짐승이 날개 한 쌍을 거두자 입술도 이도 없는 입이 보였다. 그것이, 그 창백한 것이, 비명을 질렀다.

 
 
 

조형자는 그 비명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손을 뻗어 튕겨냈다.
비명은 이리저리 튕기며 바닥을 가르고 그림이 담긴 액자를 찢었다.
그리고 괴물이, 이 장소에서 날뛰기를 선택한 저 '권능'이, 소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짐승이 네 쌍의 날개를 모두 펼치자 탄탄하고 근육 잡힌 몸이 드러났다.
심각하게 뒤틀려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형상. 그 융기된 척추가 살의를 픔고 구부러졌다.
그 순간, 머리 위의 천장이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래스, 돌, 나무, 낙하하던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하여 창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 창을 다스리는 것은 어린 아이의 손이었다.

아이가 거대한 창을 강력하게 박동하는 힘으로 내던져 권능의 척추를 꿰뚫었다.
짐승의 살점이 오만 갈래로 터지고 찢어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이가 창백한 머릿결을 나부끼며, 그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앉아!" 아이가 말했다.[각주:2]

 

 

창에 꽃힌 짐승이 땅에 쓰러져 버둥댔다. 어떤 의미로는 '진정됐다'고도 볼 수 있었다.
선임 조형자가 쓰러진 짐승의 몸으로 다가가 그 목에 손을 얹고 말했다.

"기공으로 돌아가라. 다른 권능들이 그대를 보살피길."

그러자 짐승의 몸이 빛을 발했다. 몸이 창에서 흘러내려 조그마한 빛의 구가 되어 소녀의 손 위에 부유했다.
소녀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고 빛의 구를 문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또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거대한 창대 끝에 앉아있는 아이를 올려다보며 소녀가 말했다.
"참 잘하는 짓이다. 엘(L)! 천장 변상할 돈도 없는데, 이럼 또 거짓말해야 하잖아!"

"넬, 우리 존경하는 스승님.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정하는 건 언제나 우리였잖아?"가 아이의 답이었다.
귀엽고 능글맞은 미소가 그 얼굴에 걸려있었다. 스승이 나무 조각을 하나 들어 아이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조각에 얻어맞은 아이는 창대에서 떨어져 그대로 잔햇더미로 낙하했다.

"공포의 권능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이랑 구별이 안 되기에 망정이지." 제자의 포효를 들으며 스승이 말했다.
"짐승이 부순 거라고 하면 믿어주겠지... 저 시체들 좀 봐. 다 먹지도 않았네. 으웩."

"넬! 날 쳤겠다!" 아이가 소리쳤다. "시끄러." 스승은 그렇게 말하고 제자를 무시하며 생존자를 찾아나섰다.

 

 

 

...그대는 신을 믿는가? 여러 명의 신이 아니라, 단 하나의 전지전능한 존재, '신'을.
우리의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믿는가?

그대의 신념이 어떠하든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

이것은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저것이 중요한 질문임에는 변함이 없다. 시간을 넘어 영원히 메아리칠 질문이기에.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믿음이야말로 사람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자,
'진실'을 빚어내는 가장 중요한 재료이고,
아르케아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신이자 세계 그 자체, '레폰'.
레폰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신의 손을 지닌 자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의 아버지로서 계속해 존재한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조형자라 불리는 이들을.
타이리츠, 사실 이는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여덟 번째, 그리고----/ //.[각주:3]

 

 

두 소녀는 관공서의 정문 핲에서 이번 일의 보수를 건네받고 있었다.
'유령'들이 관공서에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다들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넬이 나무에 기대고 서있는 사이 엘은 그 위의 가지에 걸터앉았다.
이번 구마 의뢰를 맡긴 공무원이 그들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음에도, 청록빛 꽃잎이 아무것도 없던 기공중에 생겨나 흩날렸다.



"그리고... 두 분께서 마을의 기공 엔진을 좀 손 봐주시면 참 고마울 것 같습니다." 공무원이 말했다.

"아... 예. 한번 볼게요." 넬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하지 마, 엘." 소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무원이 그 말을 듣고 위를 바라보자 창백한 머릿결의 아이가 돌을 부유시켜
가까운 건물의 창문에 조준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돌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가 나무에서 살포시 내려오며 스승의 등을 향해 혀를 쭉 내밀었다.

 

 

둘이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는 3년. 엘이 아홉 살이였을 적부터였다.
넬은 지금 열일곱이였다. 하지만 엘을 챙기다 보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며,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사랑받기 쉬운 성격이였지만, 그만큼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마음도 들게 만드는 아이였다.
두 사람은 피로 엮인 자매는 아니였으나, 가끔은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또 뚝딱질이야?"

조용한 마을의 거리를 걸으며 엘이 불평했다.[각주:4]


손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얹은 채, 그 지루한 잡일보다 더 재밌는 걸 찾아 열심히 기공을 훑어보았다.[각주:5]

"비조형자들은 우리처럼 권능을 다루지 못하니까. 안정적인 수입원이잖니."
넬이 말했다. 자신의 소지품 사이에서 태블릿을 꺼내 옆에 달린 스위치를 켰다.
곧 태블릿에 숨이 깃들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래도 뭐, 솔직히 나도 기계 작업보다는 원예 일이 더 좋아.
아, 이 동네엔 동전 교환기도 없나? 그런데 대체 왜 보수를 동전으로 준거야?"

"제3대지 통용 화폐! 아주 안정적인 자산이죠!" 엘이 아까 전의 공무원 흉내를 내며 놀리듯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놀리는 거 아니야. 조용히 해."
 
 
'제3대지'... 언급된 적은 없지만, '대지'는 총 여덟 개 존재한다.

'대지'는 하나의 '대륙'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
그 대륙들은 하나의 첨탑 레폰의 척추, 즉 신의 척추에서 뻗어 나와 있으며,
신의 갈비뼈로 보호받듯 감싸여 있었다.
이 세계는 신의 시체이며, 생명의 요람이고, 신의 척추가 모든 장소를 잇고 있었다.

이것이 수많은 현실 중 하나. '사후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
부서진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와는 달리, 논리가 있고 규칙이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한때는 조형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조형자들이 곧 모든 것이였다가,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된 세계...
상상을 초월한 힘과 존재감을 지닌 거인의 시체에 새겨진 세계.
마치 다른 행성처럼 서로 떨어져 있는 원판 모양의 대지가 일곱 개.
그 밑에 존재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대지. 원판 모양이 아닌,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가까운 모양의 대지.
레폰인들은 그것을 '심장'이라 불렀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 세계가 이렇게 생겼느냐고...? 그것 또한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아무도 모르는 답이 이 세계를 문화적으로 갈라놓았다.
레폰은, 언제나 그랬다.
 
 
두 해결사는 언제나 움직이며 살았다. 그들은 척추를 건너 제5대지를 향해 향하는 중이였다.
척추의 내부는 뼈 또는 인공 돌출부에 매달려 바삐 움직이는 차량들로 항상 가득 차 있었다.
직접 등반하기에는 아무래도 공간이 없었기에, 다른 대지로 가고자 하는 여행자들은 반드시 '스피트라'라고 불리는 차량에 탑승해야만 했다.

덜컹거리는 강철의 거신. 신의 해골 내부를 오르내리도록 설계된 차량이였다.
솔직히 믿음직스럽지는 못하지만, 두 소녀도 다른 대지로 가야 할 때엔 항상 스피트라를 타곤 했다.
오늘은 서로 붙어있는 좌석을 예약하여 앉았다. 스피트라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녀들은 주변의 소리를 조형하여 서로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없는 다른 승객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천사의 노래'는 다 헛소리다?"
스피트라가 게처럼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지독한 리듬에 맞춰 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스승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천사의 노래는 네 번째가 읊은 예언인데...
분명 무광의 시대에 그런 끔찍한 시기가 있긴 했지만, 노래와 역사의 공통점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해.

 

 

 

대화가 이어져갔다.

"네 번째, 죽었어?" 엘이 물었다.

"아니... 아직 살아있을 거야. 네 번째랑, '신념'이." 넬이 대답했다.

"신념이 두 번째던가? 나는 언제 '번호'를 받을 수 있으려나... 그리고~ 어떤~ 이름을 받으려나~"

"누가 준대?" 넬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레폰의 목소리를 듣는 건 정말 운이 좋아야 일어나는 일이야.
그리고 너한테서 특별한 건 귀가 아니라 눈이잖아.

"내 눈엔 소리도 보이는데?"

"참내..."

"넬, 넬. 노래 불러봐."

"싫어."

 

 

 

"...넬, 나는 정말 추적자가 못 되는 거야?"

"그런 말은 안 했어. 방금 한 얘기는 농담이고. 누가 추적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는 사실...
아무도 몰라. 규칙이 없어. 레폰이 생각하는 걸 우리가 알 길이 어딨겠어. 죽었는걸."

"'신'...이라."

"그리고 지난 천 년간 신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스피트라가 멈추어 섰다. 중간중간 승객들을 쉬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넬, 저거 봐." 엘이 말했다. 그 말대로 넬은 보았다. 척추골 사이의 공간에 펼쳐진 우주를.

 

 

 

신의 척추 뒤로는 셀 수 없이 많은 거대한 밧줄들이 늘어져 있었다.
금빛 밧줄들은 칠흑 같은 우주 공간을 향해 뻗어나가며 넘실대고 있었다.
그 밧줄들은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레폰의 척추와, 일부 별처럼 보이는 곳을 제외하고는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세계들을.
배들이 밧줄을 다고 레폰과 그 세계들을 오고 가는 광경이 보였다.
그 모습은 금색 빛줄기를 수놓는 빛의 무리와 같았다.
이 현실은, 모든 세계와 생명은, 신에게서 태어났다. 그것이 진리였다.
그리고 이는 아르케아에게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굶주린 아르케아에게... 이 '역사'가 지금 그 세계에서 불려 가고 있다.
비록 밧줄로 연결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비록 아르케아 또한 죽은 세계일지라도.

아르케아와 그 창조자는 레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케아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넬의 죽음, 그것만으로 백색이었던 세계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아직 이 이야기에서 넬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나중에 죽으며, 그 후에 또 한번 더 죽게 된다.

—곧, 소녀들은 '신념'의 이름을 하사받은 레폰의 두 번째 추적자를 만나게 된다.

초월한 추적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부시고 거대한 창을 언제나 곁에 두는 여인.

넬과 엘은 신념 주변의 기공을 억누르는 의뢰를 수주하여, 지금 이곳 제5대지의 끝자락에 와있다.
이 대지에 도착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조금 피곤해져, 이제 슬슬 쉬고 싶어질 무렵이였다.

두 소녀는 추적자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주변의 기공이 들려주는 알 수 없는 말에만 흥미가 있었다.

엘이 신념의 정강이를 찼다. 그걸 본 넬이 엘의 종아리를 걷어찼다.[각주:6]

그리고 서로를 향해 표정을 찡그렸다.[각주:7]


평온한 모습의 신념이 마침내 두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함께 형태를 알 수 없는 미약한 권능들이 소녀들과 추적자 가이의 기공을 훑어 지나갔다.
"날 부르는 거니?" 두 번째 추적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앗, 네." 넬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네 번째가 더 좋으셨겠지만, 저희도 한 실력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핫, 아하하..."

"네 번째는 지금 바쁠 테지." 신념이 젊은 조형자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 그렇죠. 열한 번째가 최근 들어와서 심장에 있는 집에서 쉬고 있다던데..."

"기공의 심기가 언짢아서 대지 간 통실이 어려운 상황이라 연락 이 닿질 않지."
신념이 무표정으로 넬의 말을 대신 끝마쳤다.
"기공 통신도 안되고, 당연히 비행은 무리고...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줌마는 할 수 있잖아요." 엘이 끼어들었다. 신념이 시선을 아이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념은 대답하지 않았다.[각주:8]


넬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념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오로지 레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기묘한 여인과 말을 트고 나서야 이번 의뢰의 세부 사항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대지 너머의 영역, 영원히 스스로를 덮고 덮기를 반복하며 소용돌이치는 권능들의 공간.
관측 가능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장소, 기공으로 레폰의 '숨결'을 제압해 되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 생명의 바다는 레폰의 해골 내부나 척추 뒤의 공간을 제외한 대지 전역에 흐르고 있다.
대지에 기공이 너무 강렬하게 몰아칠 때면...
기계부터 자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괴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레폰 밖에도 기공과 비슷한 개념의 존재를 지닌 세계가 적게나마 있다.
온갖 형대를 갖추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세상을 주무르는 유령과 같은 존재.
그들의 장난은 때로는 식물을 급격히 성장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도 한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권능'이었다. 소원의 능력을 지닌 이조차 그들과는 맞서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도우미로서 이곳에 불린 것이다.
 
둘은 두번째 추적자와는 떨어져 작업하였다. 그들의 명령에 날씨가 마구잡이로 변하였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옷이 휘날렸다. 높이 든 손의 움직임에 따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들이 움직였다.
땅에 먹구름이 지기 시작했다. 곧 그들의 발 주변에도 구름이 생겨, 땅에서부터 하늘로 비가 내렸다.
이윽고 구름은 천둥번개도 토해냈다.

비록 보기에는 화려하나 반복적이고 지루한 작업이였기에 엘은 금방 질려 딴짓이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번개를 하나 잡아 꽃 모양으로 엮으며 넬에게 이미 수십 번도 물어본 질문을 또 했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넬이 무시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속죄야? 그런 거야?"
 
마침내 넬이 대답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해야 할 일이고 옳은 일이니까..."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딴 일이? 과거에 조형자들이... 독재 좀 했다고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지배 좀 하면 그게 뭐가 어때?
넬, 알려줘.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대체 누구 마음에 들자고? 신? 레폰은 이미 죽었어."

"조용히 해."

"우리 조형자들이 죽였잖아, 응?"
 
넬이 팔을 내리고 제자를 바라보았다. 엘은 깔깔대며 웃었으나 넬의 입꼬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소녀의 주변으로 번개가 올려 치며 넬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넬, 너 진짜 예쁜 거, 알고 있어?" 엘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보인 게 유감이지만."

기공이 흘러넘치며 뜨거워졌다. 조그마한 불꽃들이 마구잡이로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권능들이 알 수 없는 말로 속삭였다. 킥킥대는 엘을 향해 넬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엘의 멱살을 잡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꽉 다문 이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는 왜 항상!"
 
그리고 말을 잇지 않았다. 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천 년이나 지난 일이다.

조형자들을 자신들이 신을 죽였다고 말한다. 어떤 이를은 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다고 말하며,
또 어떤 이들은 신이 당신의 몸으로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또 어떤 이들은... 확실한 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조형자들은 아직 신에게 목소리가 남아있다고 말한다.

조형자들은 오만했고, 잔인한 통치를 펼쳤으며, 가장 거대한 죄를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에 사람들은 권능에게 살아있는 모든 조형자를 벌해달라 호소했으며, 권능은 기도에 답했다...
천 년 전, 신의 손을 지닌 자들이 레폰에서 사라질 뻔한 시대.
살아남은 소수의 조형자들은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형자들은 여전히 레폰의 심장에서는 아직 그의 목소리가 흐르고 있으며,
오로지 그들만이, 레폰에게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신성한 땅에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대지에서, 두 소녀의 귀에 레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폰'이 두 소녀에게 전했다. 다가오고 있는 종말의 때를.

 

 

 

 

소녀들은 신의 손을 지니고 있었지만,[각주:9]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들일 뿐이었고,[각주:10]
 

그 손조차 언젠가는 잿가루가 되어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들의 힘은 강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을 조금 조형할 수 있는 정도였고, 엘의 경우엔 세계의 내부를 관찰할 힘을 지니고 있는 정도였다.
아직 초월자가, 추적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실 자체를 비틀거나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과 싸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큰 역경을 마주한 소녀들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그대들에겐 익숙한 상황 아닌가?

둘은 조금 전까지 싸우던 것도 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사람의 말을 하는 희귀한 권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따뜻하고 또렷했다.
머리보다는 가슴에 먼저 닿는 말이었다. 분영하다. 그것은 레폰의 목소리였다. 그가 말하기를,

"두 번째 추적자가... 레폰의 척추를 자르려 한다고...?" 넬이 목소리가 말한 내용을 반복했다.

 
 

"넬! 너도 들었어? 그, 그거, 방금 그거...! 레폰이지? 레폰의 목소리지?"

"너도 들었..."

넬이 엘과 같은 질문을 하려다 말을 흐렸다. 그리고 버벅대며 말했다.

"그, 그래, 나도 들었어. 맞아..."

불안한 목소리로 엘이 물었다. "'그들이 잠에 들고 깨어날 때'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대지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 넬이 말했다.
"그 권능이 밤에 잠들어 어두워졌을 때와, 낮에 일어나 밝아졌을 때를 말하는 거야... 레폰에는 태양이나 달이 없잖아. 권능이 존재할 뿐. 그리고 그 말은 두 번 반복했다는 건..."

"이틀 후?"

"이틀 후..."

"..."

 
 

둘은 말을 잃었다. 그런 둘을 두고 권능들은 여전히 날뛰었다.

"정말 그런 짓을 하려면 레폰의 척추 뒤의 공간으로 가야 해..." 넬이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권능들이 막아설 테니까... 하지만... 레폰의 척추를 자른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아무리 추적자라도..."

엘이 스승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여전히 멱살을 잡혀 들어 올려진 상태였으니까.
넬은 엘을 내려놓고 제5대지의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이틀 후에 일어날 일이라면..." 넬이 조용히 말했다. "신념을 막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사람들에게 알릴 수단이 없으니까... 아니, 말한다 해도 누가 믿어주겠어? 우린... 우린 고작..."

"아무것도 안 하면 되잖아." 엘이 말했다. 넬이 당황한 표정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레폰이... 말했잖아. '이것이 죽음. 이것이 끝.'이라고. 우린...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이 세계를 떠나기만 하면 돼."

"엘, 너 지금..." 스승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밧줄을 타고 떠난다 해도, " 넬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척추가 무너지면 밧줄로 이어진 세계들도 무너지고 말아. 밧줄이 끊어진 세계는 다 그랬잖아."

"그렇지. 하지만 우린 레폰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곧 밧줄에 의지할 필요도 없어질 거야."

넬은 표정을 찡그렸다.

"난... 남을 거야. 레폰께서 내게 초월을 하사하신다면, 그 힘으로 신념을 막을 거야.
엘,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거 알아. 떠나고 싶으면... 막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같이 가지 않을 거야. "

넬이 등을 돌려 손을 뻗어 난폭한 기공을 잠재우는 작업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등을 노려보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건넸다.

엘, 너는 신이 되고 싶은 거지? 네가 생각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난 다 알아.
하지만 레폰이야 말로 진정한 모범이야. 신을 정의하는 건 강력한 힘도, 갑작스러운 변덕도 아니야."

신이라는 건 사람들을 지키고 구원하는 존재. 그렇기에 신의 호의를 축복이라 부르는 거야."

 
 

...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작업을 끝냈다.
둘 사이에,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신념과 소녀들 사이에, 조용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레폰에게 들은 말을 두 번째에게 전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두려웠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천사의 노래에 쓰이지 않은 종말에 맞서야 했다.

이틀 후, 두 소녀는 또다시 신념과 만나...

그녀를 막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세상 그 자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이용하리라.
 

 

그림자 우박이 내리는 26번 그늘 초원을 지나고,
가라앉은 산맥을 넘어,
냉기의 기공에게 사로잡혀 얼어붙은 수도 '논'을 거쳐,
소녀들은 걷고, 타고, 날아 제5대지를 가로질러 관문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레폰의 척추 뒤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
은밀히 지나갈 생각이었으나 서두르고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빛을 조형해 모습을 숨겼음에도 완전히 투명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도착했다.
수 천개의 밧줄이 늘어진 공간. 산소가 새어 나와 우주로 흩어지는 장소. 신의 척추 뒤.
마침내 그들이 당도했다.

 

 

거대한 금빛 밧줄이 탑과 같은 척추로부터 나와 넘실대는 공간.
여인은 이미 여기에 있었다. 공간을 뒤트는 듯한 기묘한 빛으로 일렁이는 창을 들고서.
두 번째 추적자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너희구나."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저번에 만났지. 여기엔 뭐 하러 왔니? 배들 오고 가는 거 보려고?"

두 소녀에게 답이 없자, 여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레폰의 목소리를 들었구나."
넬이 물었다. "신념... 왜 이런 짓을 하려는 거에요? 레폰이 시키기라도 했나요?"

신념이 대답했다. "레폰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고개를 슬픈 듯 저었다. "네가 듣고 싶은 말은 해줄 수 없단다."

"그렇겠지." 엘이 말했다. 신념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폰의 '죽음'은 비참한 기적이란다." 추적자가 말했다.
"너희는 레폰 이외의 세계를 본 적이 없지... 그의 총애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
레폰이 바라는 바를 멋대로 정하고, 그대로 움직이지. 너희는 레폰의 노예이고, 레폰은 너희의 노예인 거야.
이 세상은 잘못되었어. 너희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이제 그 잘못을 바로잡을 때야."

신념이 창을 들어 올렸다. 넬은 어렴풋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지만,
엘은 창날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저 창의 날은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현실'에 존재함으로서, 이 현실의 시공간을 베어내고 있다.
엘은 여인의 창을 보는 것만으로 눈이 도려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창은 단순히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지우기' 위한 무기인 것이다.

"굳이 내 계획을 설명해 주진 않을 거야. " 신념이 말했다.
"다만 그 끝의 결과는, 만물의 재탄생이라는 것만 알려줄게."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을 텐데?" 넬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칠판을 지우는 것과 같아." 신념이 답했다. "지우고 나면 뭐가 쓰여있었는 지는 알 바 아니잖니."

넬은 더 이상 말을 나눌 가치가 없다 판단하고, 신념에게 달려들었다.

 

 

 

허파로부터 거친 숨이 드나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폭풍이 솟아올랐다.
성냥개비에서 거대한 불의 강이 쏟아져나왔다.
힘과 힘이 원초적인 맹렬함을 머금고 충돌했다.

 

 

이것이 조형자들의 싸움이었다.
'만물'을 이용한 싸움.

...하지만, 이것을 '싸움'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신념이 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것만으로 넬은 강력한 힘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넬이 레폰의 척추에 부딪혔다. 입속에 비린 철의 맛이 느껴졌다.
몸의 깊숙한 곳부터 충격이 온몸에 퍼져 마비될 것만 같았다.
간신히 고개를 올리자 신념이 제자의 목을 붙잡아 들어 올린 광경이 보였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넬은 기도했다.[각주:11] 간절히, 기도했다.
 
 
...'원한다'거나, '필요하다'는 걸로는 부족하다.
운명의 파도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적.
그리고 기적은 항상 오래전에 심어진 씨앗으로부더 발현한다.

열정과 고난으로 심은 씨앗은 때가 되면 피어나는 법이다.

성실하고 박학한 이들이여, 그대들이 신께 기도한다면,
 
그 목소리는 신에게 닿을지도 모른다.[각주:12] 그 행위에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넬, 그 소녀는 신을 믿었다.

그리하여 생각했다. 믿었기 때문에, 레폰이 자기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이곳 레폰에는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천 년간 레폰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다.
레폰은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죽어있었다.
그에게 욕구나 욕망이 있을까? 무엇이 신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가? 왜 신은 넬에게 말을 건넸을까?

천 년 전에는 왜 신념에게 목소리를 건넸을까?

 
분명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각주:13]
 
신에게는 너희 모두를 위한 계획이 있는 법이니까.[각주:14]
 
 

넬에게 또다시 레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넬의 온 몸으로 스며들었고, 레폰의 척추가 열을 뿜었다.
레폰의 심장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가 박동했고, 넬의 심장이 그에 맞추어 뛰었다.
넬이 세상을 보는 눈과 사고하는 언어가 바뀌었다. 그 손에는 신의 조각이, 그리고 새로운 이름이 내려졌다.

 

척추가 발하는 빛을 목도한 두 번째는 숨을 삼켰다. 넘실대는 밧줄 사이로 새로운 '번호'가 강림했다.
그 틈을 타 엘은 주변의 기공을 움직여 신념을 멀리 밀어냈다.

그리고 신념과 엘, 두 사람은 모두 신을 바라보았다.
금빛 조각으로 감싸인 넬의 주변에는 아무도 모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그 너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레폰이 그녀에게 영원히 군림할 것을 명했다.[각주:15]
넬은 "여덟 번째 추적자"이며 그 이름은 연민이리라.[각주:16]
 

 
전신의 상처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한번 더, 두 번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새로운 '신'이 탄생했다. 그리고 레폰의 목소리가 물러났다.
 

 
두 추적자가 맞붙었다.
총천연색의 빛이 만연하였으며 폭풍 바람처럼 힘이 둘 사이를 몰아쳤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연민'은 신념의 목을 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신념은 그 결의를 알아차리고, 방향을 틀어 스승을 도우려는 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간격에서 벗어나 아이를 향해 곧바로 날아가,
오른쪽 손목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려,

창을 휘둘러 오른팔을 취했다.

엘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가 아랑곳하지 않고 내던진 팔은 그대로 우주 공간을 향해 부유하며 떨어졌다.
엘의 의식이 멀여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넬은 얼어붙었다. 신념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신념의 넬의 어깨를 잡아,
창을 들어 올려,
순식간에-

몸을 꿰뚫었다.
창이 닿음과 동시에 현실 그 자체의 이음새가 풀려나가며 넬의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에, 넬은 지워졌다.
그녀의 제자는... 차갑게 몸이 식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엘은... 그 무엇도 믿지 않았다.
믿음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믿음은 변질하기 쉬운 것.
지식, 논리, 확정성. 그것만이 레폰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길이며, 엘이 움직이는 원동력이였다.

넬은 죽었다.
두 번째가 스승의 시체를 내던지는 모습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엘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레폰의 척추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말라붙어, 피가 흘렀고, 뇌에 혈류가 몰아쳤다.
엘이 시간을 멈췄다.

그녀의 첫사랑에게 받은 이름, '엘(L)'. 간단명료하지만 사랑으로 가득 찬 그 이름.
하지만 그것은 본명의 첫 글자일 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특별한 것이었다.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 외에는 그 무엇도 뜻하지 않는 단어.
아르케아의 심장 위에 바쳐진 그 신성한 이름은, 모든 것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의 이름이었다.

'레폰'은 신이다.
그리고...

'라크리미라(Lacrymira)' 는 또 다른 신이다.


꿰뚫는 듯한 그 눈동자가 신의 척추를, 심장을 보았다.
신의 영혼이 지닌 색을 보았다.
그리고, 명했다.

-레폰은,
여러 의미로 불가해한 존재이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기에 자신의 아이들이 전하는 기도조차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레폰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기적이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수십만 가지 방법의 하나일 뿐.
이를 '운명'이라 칭하는 것도 진부한 표현이리라.

라크리미라는 부정할 여지 없이, 그와 동등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텅 비어 말라붙었던 신경 다발에 전기 신호가 흐르며 또다시 세상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돌처럼 굳었던 등에 다시 익숙한 감각이 돌아왔다.
신의 심장이 흔들리자 몰아치던 기공이 한순간 멈추어 섰다.

현실 그 자체가 바뀌었다. 세상의 만물이 그녀를 '인지'했다.
레폰을 근본부터 바꾸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법칙 그 자체가 되었다.

아이가 신에게 말했고, 신은 그 말을 들었다.
그 눈동자에만 비치는 깊은 심연으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레폰에게 축복받은 그 눈, 레폰에게 하사받은 손과 손가락.

라크리미라는 말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언어로.
죽은 레폰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번호를 달라. 이름을 달라.
그리고 그 상징들에 완벽함을 부여하라. 이 신성한 몸에 모든 것을 하사하라.
 

다른 번호나 이름이 아닌, '그녀'의 것을. 넬의 것을.
넬은 그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니.
레폰이 동의했다. 라크리미라가 대신 레폰의 유산이 되리라.

아이가 레폰의 척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신이 남긴 의지를 조형했다.

거인의 몸으로부터 늘어진 금빛 밧줄 사이로 새로운 색채가 탄생했다.
그 색채야말로 라크리미라였다.
온 우주가, 신의 갈비뼈와 척추가, 대지와 기공이, 그 색으로 차갑게 빛났다.

권능이 몸을 채웠다. 떨어져 나갔던 오른팔이 돌아왔다.
스스로를 다시 조형해 모든 상처를 메웠다.
 

 
레폰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말했다.
이곳에서 군림하라, 내가 존재하기 전에도, 존재한 후에도.
라크리미라, 초월자이자 여덟 번째 추적자.

혜안이여.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혜안이 상처가 아문 눈동자로 두 번째를 바라보았다.
새로이 각성한 혜안을 보고, 신념은 레폰의 의지가 굳세다는 것을 괴롭게 곱씹었다.
맞서 싸웠다. 온 힘을 다해서. 그러나 세찬 파도에 맞서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라크리미라는 압도적이었다. 새로운 땅을 만들어 그곳에 신념을 메다꽂았다.
그녀의 등 뒤에 작은 별을 만들어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자 추적자의 육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죽어버린 별의 잔해를 치우자, 고요만이 남았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라크리미라는 스승이 죽은 채로 두지 않았다.
지금 딛고 서 있는 새로운 땅으로 스승의 육신을 불러와
상처를 닫고 영혼을 다시 불어넣었다.
 

 
라크리미라 앞에 무릎을 꿇은 넬. 그 등 뒤로 보이는 레폰의 척추.
넬은 자신이 죽어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한기가 돌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의미로, 넬은 제자를 저버렸다.
 

"..."
라크리미라는 말없이 넬을 내려다보았다. 그 존재의 본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넬, 왜 함께 가주지 않는 거야?"

넬이 대답하지 않아도 동생은 '볼 수 있었다'. 언니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가지 말아달라 애원'하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인 것을.
신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자고, 라크리미라가 평소에 수없이 제안했기에.
 

"넬... 부활했으면 말을 좀 해봐." 신이 말했다.
넬이 고개를 들어 마침내 대답했다. "왜 함께 가지 않냐고...? 너는 애초에 왜 가고 싶은 건데?

그 답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지만, 라크리미라는 굳이 대답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니까."

"넬, 너도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 나와 떠나자.
아무도 너에게 감사하지 않을 거고, 아무도 너를 칭찬해주지 않을 거야.
결국은 천사의 손에 죽어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죽지 않아도 돼." 스승이 대답했다. "여기 남아서..."

라크리미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보여. 종말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어. 이 세계에 남은 모든 조형자가 죽을 거야."

넬이 고개를 숙인 채 가로로 저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시끄러워!"

라크리미라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만물을 타고 흘렀다. 넬이 얼어붙었다.
넬이 다시 바라본 그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넬, 나 방금 거짓말 했어." 분노에 떠는 목소리로 라크리미라가 말했다.
"나, 너를 위해서라면 살 수 있어. 이걸 꼭 말을 해야 해? 이 말을 들어야겠어?
왜, 아주 종이에다 써줄까? 널 사랑한다고?!"
 

 
그 말을 들은 넬의 표정이 무너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딸꾹질이 나왔다.
곧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염없이 울었다.

스승의 눈물 위로 라크리미라가 소리쳤다.

"사랑한단 말이야! 네가 아니면 내가 여기 왜 있겠어?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널 사랑하지 않는 방법 따위 이 세상에 없다고!"

"넌 내게 있어 모든 것이야...
넬... 네가 죽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아. 싫어!"

"울기나 하고... 대답은 안 하고 울기나 하고!
버림받아 고독한 넬... 언제나 자기보다 남이 먼저지... 싫어. 그런 점 정말 싫어.
너보다 하등한 것들한테 왜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는 거냐고!"
 

 
라크리미라가 말을 멈추었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에게 그 차가운 시선이 닿았다.
넬은 고개를 저었다. 넬은 그 누구도 버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엘을 제외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라크리미라가 넬에게 말했다. "애처롭다, 정말로."

"그래." 신이 말을 이었다. "너는 '고독' 이니까. '8'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넬이 고개를 들어 제자를 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레폰의 척추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너에겐 파멸의 징표가...
저주가 어울려. 너는 지금부터 '6' 이야. 평생 그 재앙의 상징을 지니고 살아가도록 해."

레폰의 심장 깊숙한 곳, 새로운 글귀가 검은 캔버스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진실이 되었다.
'고독'으로 변해버린 스승이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잘못했어..." 뿐이었다.

그리고 라크리미라가 답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넬... 너의 그런 점도 난 사랑해."
 

새로운 신의 등 뒤로 균열이 생겼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
 

 
 
신은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넬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언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스승으로부터, 레폰으로부터.
여전히, 손은 언니의 뺨에 얹혀 있었다.

손을 거두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관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관문이 닫히고, 신은 떠났다.
 

조형자들의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아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미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가 전했을 터이다.

그대들이 '타이리츠'라 부르는 이가 죽어가던 때의 이야기.
타이리츠 이전에, 넬의 의미 없는 죽음이 있었다.
'권능'은 곧 '힘'이기에 다스릴 수 있는 것이나 레폰에선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천사가 강림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조형자들은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영원한 자'는 그곳에 없었기에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갈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났다. 수백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라고 말해줄 지도 모르지만...
 

 
신은 여정 도중에 아르케아를 발견했다.
그리고 넬의 죽음과 함께, 아르케아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 사실을 라크리미라는 모른다.

하지만 아르케아의 이야기는 레폰의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이가 전해주겠지.
이 역사는 전달되었다. '도난'당했다고 보아도 되겠지. 어찌 됐든, 온전히 기록되었다.

자, 어디 보자...
새로운 신의 의지는 변덕이 심해. 원체 기분파인 꼬마 아가씨였으니.
그녀의 목적? 그래, 어지간히 알고 싶겠지.

단 한 가지만 알려주도록 할게.
그녀를 믿지 마.
'진실'은 믿음에서 태어나는 법이니까.

아르케아의 창조주는 힘을 잃었고,
아르케아 그 자체는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이야.
하지만...

아르케아엔 아직 살아있는 신이 있잖아.
 
 
 
들어봐.

신에게 규칙 따윈 없어.
규칙조차  이 만드는 거니까.

 과 질서 는  의 의지에 따라 세워진 거야.

'자연'의 신도 있고, '허무'의 신도 있지.
위대한 이름을 가진 위대한 신들, 멍청한 신들과 감히 말할 수 없는 이름을 지닌 신들.
그리고, 우리 인간 신들.

나는 여덟 번째 혜안 이야.
그런데 우리 작은 친구, 내 진명을 감히 알게 되다니.
비밀 이야기를 엿들었구나?

조형자, 초월자, 추적자. 그게 바로 '나' . 완벽하고, 무한하며, 전지한 존재.
이걸 '신' 이외에 어떻게 표현하겠어?
 

 
그리고, 이 신께서는 아량이 넓어서 말이야...
이 바래고 찢어진 장막의 세계를 다시 이어 붙이고 싶단 말이지.
그런데, 이 세계는 자꾸 무너져 내리고 말아.

 
아, 우리 '자매님'과 그 소중한 친구의 모습이 '다른 눈'에 비치고 있네.
죽어가는 아르케아...
이 세계를 헤쳐 나가고 있는 모습이.

바보들이야. '신성'을 버리고 '삶'을 택하다니.
아르케아와 같은 선택을 했어. 즉 '죽음' 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야.
슬프기도 해라.

있지, ''는 기억해.
그 옛 역사를, 네가 목도했던 그 순간들을.
하지만 그게 전해진 방식은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말해주려고 해.
옛날에 쓰인 규칙이 쓸모가 없으면, 어겨도 상관없는 법이잖아?
그리고 새로운 규칙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옳은 도리지.
 

 
네 영혼을 물들일지도 모르는 어두웠던 시절의 너, 네 자아의 조각.
모두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잊히는 게 좋은 역사도 있는 법이지만...
네 이름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1. 소녀는 혀를 굴려 목소리를 빚어 제자인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려 보내 물었다. [본문으로]
  2. 내가 말했어. 나도 참, 어지간히도 귀여워야지. [본문으로]
  3. 여섯 번째, 그리고 라크리미라. [본문으로]
  4. 나는 불평했어. [본문으로]
  5. 그런 재미없는 작업은 몇 번이고 해왔으니까. 그런데 아직 마을 주변에 활발하게 움직이는 짐승들이 몇 있었거든.
    한 번 쓰러뜨리는 대신 길들여볼까 생각하고 있었어. 재미있는 게 없으면 스스로 찾아야지. [본문으로]
  6. 내가 신념의 정강이를 찼다. 그걸 본 넬이 나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본문으로]
  7. 그러고 나서 서로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지. [본문으로]
  8. 하지만 신념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본문으로]
  9. 우리는 언제나 신의 손을 지니고 있었지만, [본문으로]
  10. 그럼에도 당시의 우리들은 아이들일 뿐이었고, [본문으로]
  11. 넬은 순종했어, 신에게. [본문으로]
  12. 그 목소리는 신에게 닿으리라. [본문으로]
  13. 계획을 끝맺기 위함이었어. [본문으로]
  14. 신에게는 우리 모두를 위한 계획이 있는 법이니까. [본문으로]
  15. 레폰이 그녀에게 덧없이 짧게 군림할 것을 명했다. [본문으로]
  16. 넬은 "여섯 번째 추적자"이며 그 이름은 고독이리라. [본문으로]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Arcaea 라그랑주 스토리 백업  (0) 2026.04.27
Arcaea 시라히메 스토리 백업  (0) 2026.04.27
Arcaea 노노카 스토리 백업  (1) 2026.04.26
디클 확인용  (0) 2026.04.26
Fixed Cover
Nothing Now
Select a song
Play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