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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컨택 @dearDIEIN


왼쪽 플레이어에는 가볍게 듣기 좋은 곡들이 있습니다.

Arcaea 라그랑주 스토리 백업

풍경이 바뀌었다.

매 걸음마다 풍경이 변했다. 라그랑주의 걸음이 땅을···
그리고 공간을 움직였다. 태피스트리로 다가갔다.

실이 완전히 꿰여 있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그녀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가 놀란 듯이 갑작스럽게 움직였다.

주변의 세계는 백색이 아닌 흑색이었다. 허공에 별들이 걸려있었다. 가야 할 길은 조각이 나있었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아르케아.

그 실은 풀려 닳아가고 있었다. 방치되고 잊힌 실가닥.

그 앞에, 그리고 그 안에 서있는 소녀는 이의 첫 번째 목격자였다.

진정으로, 혼자인 소녀.

"아무래도," 라그랑주가 속삭였다. 사실을 다시 확인하듯이.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도달하려면..." 그녀가 먼지투성이의 뒤틀린 길을 밟으며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겠군. 내가 걸었던 길은 부서져버렸고, 앞에 난 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마침 그 말대로 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하얀 나선형의 길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 움직이다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들이 허공에 둥둥 떠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각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또 하나." 라그랑주가 말했다.


"너는 할 말 없니?" 그녀가 카론에게 물었다.


카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봐." 소녀가 카론의 쓸모없는 머리를 토닥이며 명령했다.


답이 없는 카론의 주변으로 삼각형의 광륜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 건가···" 그녀가 스스로 대답했다.

라그랑주는 카론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텅 비어버린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 ‘가장 낮은 세계’에 오면 네 기억이 돌아오거나, 최소한 성격 같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카론.”


실패한 실험의 결과물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S 모양을 그렸다. 생각에 잠긴 듯이 귀가 움직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나."

라그랑주는 카론에게서 손을 떼며 인정하듯 말했다. 일견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라그랑주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백색이었던 적에 라그랑주가 만들었던 유리 사역마, 카론은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벌써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특이하게도 그 길은 라그랑주가 여태 보아온 길보다 훨씬 넓었다. 길이라기보다는 한 구획에 가까울 정도로.

아르케아 몇 개가 라그랑주의 오른쪽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마치 라그랑주가 자신들의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녀가 조각들을 지나가니,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듯 흩어졌다.

라그랑주의 목적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의 땅은 과거의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공간에, 새로이 연구하고, 새로이 발견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닳아빠진 태피스트리의 끝자락, 그녀는 이 끝없이 바뀌는 길을 따라가며, 언젠가 이 태피스트리를 짠 장인을 만나길 바랐다.

그 손으로 하여금 다시 이 천을 만지게 하도록.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세계로 걸어나아갔다.

흑색의 세계로, 공허 속으로···


이 세계에는 상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곳 공허뿐 아니라, 아르케아의 세계 그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경계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아니, 라그랑주가 깨어난 후 보아온, 아르케아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우선, 라그랑주는 깨어난 후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아르케아의 개념을 먼저 깨우쳤다.
그리고 아직도 라그랑주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르케아는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라그랑주에게 밀어붙였다.
마치 ‘안녕. 넌 이 세계에 갇혔고, 여긴 이런 곳이야.’ 라고 말하듯이.

이 세계는 기억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서관이었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폐허와 의미 없는 이름, 이름 없는 외로운 소녀만이 존재하는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에 왔을 때 우선해야 하는 일은 비치된 장서를 읽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 사이에 공통된 주제는 없었다.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다. 제대로 된 도서관이란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녀가 봐온 기억들을 통해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반면 아르케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책, 기억들은 놓여있는 위치도, 둥둥 떠다니는 모습조차 제멋대로였다.

이 세계 속 그녀의 존재 역시 너무 우연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깨어남과 동시에 아르케아가 무엇인지는 깨달았어도,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정말," 라그랑주가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봐온 세계들을 떠올려봐, 카론."

그 말에 카론은 라그랑주를 바라보았다. 카론의 눈동자 안에서는, 지성의 조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과 반려⋯ 유리는 공허 속을 걸어 나갔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너를 구성하는 세계들을 떠올려봐," 라그랑주가 반려 유리의 귀를 살짝 만지며 계속해 이야기했다.

"그 기억들에선 ‘존재’가 어떤 개념이었지? 여기 공허는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세계와도, 너를 이루는 그 어떤 기억과도 달라··· 만들어진 목적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듯한···”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떻게 생각해?" 라그랑주가 물었다.

카론의 시선은 앞에 놓인 하얗게 굽이진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그랑주는 품에서 카론을 놓아주었다.

"난 너무 애매하다고 생각해."

라그랑주가 말했다. 카론이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멋대로 생각하고선, 말없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과거의 풍경을 생각하며···

그러자 과거가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 아니면 현재인가···?

"뭐···?"

소녀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구름이다.

둥둥 떠다니는 길만 있던 곳에 구름이 나타났다.

허공에 어른거리는 꿈같은 형상이 경고 없이 라그랑주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다시금 보였다.
새하얀 폐허와 부유하는 유리 조각의 세계.
라그랑주가 기억하는 유일한 세계.
그녀가 뒤로 놓고 온 세계가···


이 풍경은 현재다.

만약 이것이 기억이라면, 그녀가 깨어나서 봐온 기억들과는 전혀 다르다. ‘차지’할 수 있는 시점이 없었다.

단지 오래되고 척박할 뿐인 세게.

“···”

라그랑주는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장소가 나를 놀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소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계속해 나아갔다.
라그랑주는 처음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스스로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그런 건가. 라그랑주는 공허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길을 더 나아가자 백색의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 더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 텅 빈 광경을 비출 뿐이었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녀의 모습이 비치기도 하였다.

예상했지만, 시시했다. 라그랑주는 시험 삼아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창문을 통해 저 세계로 다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아르케아의 세계를 떠올리거나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그냥 거기 머무르지 않았겠나?

그러한 내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잠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았다.

소녀는 많은 기억들을 보아왔다. 세계의 진실을 밝힐만한 기억이 있으리라 짐작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로 찾은 것들은 매우 평범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

이미 사라져 버린, 반복되던 일상들. 많은 것을 배웠지만 자신이 깨어난 이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계를 넘어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본 세계의 일부를 자신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그 기억에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다.

라그랑주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세계의 창문이 주변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단지 카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론을 만든 것도,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

“만약에”가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에 사람도 도시도 사라져 버린 이 기억의 세계를 이용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녀는 아르케아의 조각들을 끌어다가 온 노력과 의지, 그리고 바람을 쏟았다. 그리하여 카론이 탄생했다.

“···”

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론은 마치 위성이 모성 옆을 지키듯 그녀의 주변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카론은, 그 의미 없는 세계를 나타내는 거울이었다.


말없는 소녀는 말없는 파트너와 함께 어둠 속으로 전진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 끈질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적어도 신이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그녀가 여행하는 이유였다.

신을 찾고 싶었다.

“흔히들 지적 설계라고 하지···” 라그랑주는 어떤 기억에서 보고 배웠던 것을 다시 되새겼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게의 뒤틀림이 극심해졌다. 가로선이 사선으로 변했고, 수평은 뒤집혔다.

나아가려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디면 되었지만, 걷다가 잠시라도 집중이 풀리면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거나, 위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창조자를 대신해, 라그랑주의 바람대로 세계가 움직이는 듯했다. 투명한 땅 위에 밟히는 투명한 발자국을 터덜거리며 말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생각한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았다.

"이 세상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어."

이토록 분별없이 만들어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곳에도 태양이 있다. 백색의 세계에서는 하늘 그 자체가 빛났지만, 이곳에서는 어둠 속에 숨은 태양이 잊힐 정도로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르케아의 끝나지 않는 낮에게 빛을 빼앗겨버린 걸지도.

"뭐, 그 영원한 낮도 최근에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별빛은 언제나 그렇듯 하늘에 가득했다.

몇 시간 전부터, 어쩌면 며칠 전부터, 소용돌이가 공허 속 현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구름 대신 시선을 사로잡는 새롭고 기이한 현상이었다.

잊히고 만 태양과 미완성의 세계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며 구름도 그렇다. 이 공간 전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도 때때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도 있고, 모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나타나면 존재 그 자체가 뒤틀린다.

‘이상현상Anomaly’이었다.

그녀는 백색의 세계에서도 이상 현상과 몇 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아까 전까지 존재하던 창문을 통해서도 이상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을 뒤틀어버리고 파괴하는 현상은, 라그랑주에게 있어 일상이었다.

이 공간은 그 현상들이 집중된 장소였다. 그녀가 보기로는 이상 현상에겐 전혀 의도나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만든 신은···

“···”

라그랑주가 검은 소용돌이 앞에 멈추어 섰다. 이 공간에 몇 남지 않은 기억의 유리조각이 미끄러지듯 그 속을 통과하며 몇몇 조각은 얇아지거나 갈라졌다.

이 태피스트리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그랑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단지 인격과 세상에 대한 단순한 상식만을 지닌 채, 라그랑주는 선입견도, 기억도, 사상조차 없이 깨어났다.

···그 사실이 구역질 났다.
여태껏 말하고 생각해 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아르케아의 세계가 무의미할 리 없다고, 라그랑주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 세계엔 의미가 있다. 넘쳐흐를 정도로.

의미뿐만 아니다. 기억도, 건물도, 유리도 있다.

그리고, 소녀들도···

어째서일까?
"···카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위성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알아들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라그랑주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 말했다.

"아직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잘 따라다니네··· 날 주인으로 여겨주는 거니, 카론?"

소녀가 카론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그 머리에 박힌 눈이 반짝였다.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그래. 그리고··· 그 사실 덕분에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아."

별일 아니라는 듯, 라그랑주는 눈앞의 소용돌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카론은, 라그랑주의 팔이 유리의 실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때? 이건 마술일까, 카론? 아니면 너와 나는 같은 존재일까? 네 안에는 피가 없지. 나한테는 있을까?"

라그랑주의 몸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심장이 있고, 박동한다.

그녀에겐 생각이 있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라그랑주는 왜 이 세계에 있는 걸까? 다른 소녀들은 왜 있는 것일까?

···소녀의 혈관 속에 피가 흐를지 몰라도, 볼 수는 없었다.

라그랑주의 “몸”은 기억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한때 팔이었던, 한때 자신의 가슴이었던 은색 실가닥···

드디어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이 육체는 창조된 것이다.

“···?!”

카론이 라그랑주의 옆구리를 치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실이 다시 모여 그녀의 몸을 이루었다.

라그랑주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서. 카론을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다.

···개의치 않으며 그녀는 가슴을 폈다.

···카론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소녀는 말했다.

"···끝자락을 보러 갈까?"


언제 일어난 일일까?

언제 어둠이 떨어져 나가··· 이것이 됐지?

어둠이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떨어져 나갔다.

아르케아 바깥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을 움직여도 말소리를 전할 대기가 없다.

이곳에선 그 무엇도 진동하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라그랑주의 눈에 희미하고 기이한 평면이 비치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공간이 새어나가는 듯했다.


마치 내가 이 모든 걸 보지 못하도록 막는 듯해···

잠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어. 여기에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좀 더 그 가능성을 고려했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난 길을 잃어버렸어.

아니···

길을 "잃는다"라는 건 “장소”가 존재한다는 말이잖아?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방향.

더 이상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지. 아직 나는 실감이 잘 안 나···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봐,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다리도 없고, 혀도 없어.

나에게 남은 건 두 눈과, 희미하게 일렁이는 뇌의 흔적뿐이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움직임도 감각도 모두 빼앗겨버린 사람의 정신은 얼마 안 가 갈가리 찢겨버려. 집중해야 해.

이 세계를 만든 신은 집중하지 않았으니까.


······

···흠.

그래··· 이 세계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진 거야. 설계도 없는 건물과 같지. 두루뭉술한 인상뿐.

땅이 있고, 햇볕이 있지. 태양이 저문 후엔 별을 머금은 밤하늘이 찾아와. 밤하늘마저 떠난 후엔?

아무도 몰라. 잘난 신께서도 모르는 모양이지?

솔직히 말할게.


너. 뭘 하겠다고 이런 세계를 만들었어?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 왜 내가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나한텐 삶이 있었어. 네가 빼앗아가버린 삶이.


······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죽은 거야?


오빠를 좋아하던 그 아이처럼? 아니면 붉은 옷을 입은 그 아이처럼?

내가 그 사실을 무서워할까 봐?

이··· 하아.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응?

네 이기심으로 만들어낸 이 세계에 갇혀서 내가 뭘 해야 하냐고. 너 자신을 위해 만든 세계잖아, 아니야?

네가 도피할 낙원이잖아. 어떻게 만든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게 뭔데?
또 몸이 풀려나가.

어이가 없어.


그 아이가 왜 이 세계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드디어 이해했어.

진실을 알게 되면 누구든지 이 세계를 없애버리고 싶어 할걸.

날 구원한 거라고 생각해? 틀렸어. 설령 그렇다 해도··· 난 다시 파멸했어.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대체 어떡하면 좋냐는 말이야?

카론···
여기에 카론은 없지? 내 몸은? 나···

나를···


나를 없애줘··· 카론은 그때 왜 나를 막은 거지? 되돌아보면···


나 지금 되돌아보고 있는 건가?


내 눈이 어디 갔지?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가 어디였지?

아냐··· 아냐··· 아니야···

아니, 안돼. 정말 되돌아갈 수 없다고?

벗어날 수 없다고?

움직일 수조차 없다고?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아직 손톱이 있었으면 뿌리까지 닳도록 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있지···

비록 너는 껍데기를 모아 날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고작 껍데기가 아니야!


나한텐 감정이 있어. 이런 일 따위 원하지 않아.

들려? 내 생각이?


이런 건 싫다고!
나는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 대가가 이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나니···

가슴속에 찌꺼기가 쌓이는 느낌이야··· 가슴, 가슴이 어디 갔지···? 또 내 손은?

맞아··· 사라졌지···

——

이건 빛이 아니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그 새하얀 폐허의 세계를 떠나 공허에 도착했을 때엔, 어둠이 반가웠어.

모든 게 달랐어. 눈부시지도 않았고. 그 무엇도 “당연” 하지 않았지.

빛, 어둠, 수많은 세계에서 보아온 아주 기초적인 개념. 빛은 따뜻하고 상냥하며, 어둠은 무섭고 불가사의하지.

그래도, 나는 어둠을 알고 싶었어.


······

대략적으로 느끼고는 있었어. 그리고 그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지. 이 세계는 약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피난처라는 것.

하지만 난 달라.

난 이 피난처를 만든 겁쟁이와는 달라.

내가 만들었으면 이것보단 훨씬 좋은 곳이었겠지.

카론이 보여줬듯··· 보여주고 있듯.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그런 더 나은 진실을 찾고 싶어서 난 어둠 속으로 전진했어.

하지만 결국 찾아낸 진실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씁쓸하고 무자비했어.

이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어. 시간의 개념조차 잃어버렸어.

그리고 가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게 보여.

빛, 진정한 빛이.

······


저 빛이 나를 인도해 온 걸지도 몰라.

아무한테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평생 비판해 온 것에 몸을 맡기는 건 지는 기분이 들어.

하지만 분명 저 빛은 나를 부르고 있어.

내가 두고 온 세계의 빛이, 나를 원하고 있어.



그 빛 속에서, 나는 구원받아···




······

알았어, 손을 잡을게.
빛에 가까워지니,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와. 입김마저 보이는 듯해.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이 진실은 두고 갈게.

절대로 잊진 않겠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여기에 두고 갈 거야. 난 진심으로 생각해.

신보다 내 솜씨가 더 좋을 거란 거.

그런데 뭔가 만들려면 일단 손부터 되찾아야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거야. 정말로 할 거야. 무언가 창조할 거야.

하지만··· 이 감정은 자신감이 아니야.

복수심에 가깝지.

이 세계를 바꾸겠어. 더 나은 곳으로.

네가 망가뜨린 채 내버려 둔 세계잖아. 뭐든 가능하지 않겠어?



아마도 그럴 거야.



아니···




그럴 거라고 확신해.

——


아르케아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라그랑주는 아르케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많았으나, 별 문제는 아니었다.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라그랑주는 다시 카론과 함께 공허로 찾아왔다.

그 끝자락에 어떻게 도달했었는지, 아직 자신도 몰랐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확실했다. 연약한 영혼이 만들어낸 이 기묘하고 망가진 감옥에선··· 그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끝자락에서 돌아오는 것도. 공허에서 돌아오는 것도.

다른 소녀들을 만나는 것도. “창문” 너머로 건너가는 것조차도.

존재가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겠나?

라그랑주가 두 손으로 카론을 들어 올렸다. 카론의 눈이 반짝였다.

"···네가 나의 등대였던 거야?" 소녀가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둔한 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냐’같은 표정이네. 아무 말도 안 하는 주제에.”

그 말에 카론은 귀를 씰룩씰룩 움직였다.

"하하···"
라그랑주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카론을 놓자 날아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이제 그들은 아르케아를 향해 걸었다. 길을 수놓는 빛의 구름을 바라보며.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구름들과는 다른 특이한 반짝임. 일렁이는 표면. 그 안에 비추는 세계의 시간은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뛰는 등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분열이다. 또다시 하늘이 갈라진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일으킨 그 사건과는 다르다.


그림자에게 쫓기는 소녀···

그리고 빛으로 감싸인 소녀.

그렇다···

또 다른 “끝자락”이 나타날 것이다.



저 틈새 사이로 빠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안은 채, 라그랑주는 그 끝을 바라보았다.

결말을 향해가는 소녀들을.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소멸을.

라그랑주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빛과 대립의 춤.

아르케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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